"해복칵개 우서바요" 한글 떼기 천천히 해도 괜찮아!
"해복칵개 우서바요" 한글 떼기 천천히 해도 괜찮아!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02.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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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글자를 안다는 것의 의미

"엄마, '카' 어떻게 써? 카!"

거실 작은 책상에 앉아 한참을 곰지락거리던 연이가 고개를 빼고 묻는다. 

"그럼 개는?"

저녁밥 하는 엄마의 대꾸가 늦어도 연이는 개의치 않고 꼼질꼼질, 무언가를 쓰는 모양이다. 요즘 연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선 편지쓰기가 유행이라고 한다. 한동안 유치원 가방을 열면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가 네댓 통씩 들어 있었다. 연이는 예나가 자신에게 왜 두 통이나 편지를 썼는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자기는 재하에게만 편지를 써주었다고 속닥거리기도 했다. 편지를 주고받는 게 연이에게 꽤 재미있는 일이었는지 연이는 집에서도 곧잘 내 손에 꼬깃꼬깃한 종잇조각을 쥐어줬다.

아직 글자를 잘 모르는 연이의 편지는 주로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종이를 펼치면 고운 공주님이 있고 그 밑에 삐뚤빼뚤하고 정성스러운 글씨로 내 이름이 쓰여 있곤 했다. 고맙게도 연이는 어려울 법한 엄마 이름을 자기 이름 다음으로 익히고, 자주 썼다. 어느 때는 바르게, 어느 때는 틀리게. 그런 연이가 유치원에서 내주는 한글 숙제를 조금 하고 나더니 자신감이 붙었나 보다. 며칠 전 엄마, 아빠, 동생 이름을 쓰며 "'가족'은 어떻게 쓰는 거야"하고 물었더랬다. 이번엔 어떤 글자가 쓰고 싶은 걸까. 집중하느라 굼벵이처럼 둥글게 말린 연이의 등을 눈으로 쓰다듬는다. 지금처럼 제 몫인 양 한글을 익혀가는 연이는, 연이의 속도대로 알음알음 글자를 깨치게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글을 빨리 떼는 건 부모의 자랑거리다. 글자를 먼저 안다는 건 늦된 아이보다 똑똑하다는 의미로 은근히 치환된다. 당신 아들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일찍 글자를 깨쳤다고 삼십여 년 전 일을 어제처럼 말씀하시는 시어머니를 보아서는 오래 전부터 그랬을 법하다. 나 역시도 "우리 집에 놀러와"하고 제법 능숙하게 쓰여 있는 편지를 보며 '우와, 민아는 한글을 다 떼었구나'하고 비밀스럽게 감탄했으니까. 어느 집 아이는 한글 공부하러 공부방에 다닌다고 하고, 연이 친구는 학습지를 시작했다고 한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한글을 가르치겠다고 다짐을 해봐도 귀는 항상 열려 있고, 마음은 때마다 흔들린다. '연이가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불안은 들쑥날쑥 얌전할 줄을 모른다.

한글을 안다는 것은, 아이의 기준에서 보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어른에게 글자라는 세계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어서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체로 무감각하다. 그러나 한번 글자를 알게 되면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 일본의 그림책 작가 마쓰이 다다시는 그래서 글자를 일찍 떼는 요즘 아이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그림만 보고 들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던 때를 쉬이 지나가는 까닭이다. 무한하고 풍요롭던 그 세계는 아이의 기억 가장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될테니까.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이맘 때 아이들은 자신만의 소중한 세계를 최선을 다해 깨고 있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 말이다.

연이가 건넨 편지. "행복하게 웃어봐요"를 쓴 것이다.
연이가 건넨 편지. "행복하게 웃어봐요"를 쓴 것이다. ⓒ신은률

◇ 연이의 주문, "해복칵개 우서바요"

엄마가 되고 나서 나는 이전보다 꽤 실용적인 사람이 된 것 같다. 마치 엄마라는 존재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돼 있는 것처럼 어딘가에 들인 시간과 돈, 하다 못해 마음씀씀이까지 모조리 아까운 것이다. 어느새 '글자를 익히고 나면 무얼해야 하나' 타다닥 자동 계산이 되고 만다. 더 많은 학습의 세계를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읽는 즐거움 같은 무형의 것을 어떻게든 보여줄 것인가. 전자는 쉽고 후자는 까다롭다는 걸 우리는 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밥솥에서는 보온을 알리는 소리가 나고, 연이는 또 내 손에 편지를 쥐어준다.

행복하게 웃어보라고 연이가 나에게 주문을 건다. 생각보다 센 민트향 캔디를 먹은 것처럼 머리가 알싸하게 시원하다.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느낌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글자를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결이 엄마를 야무지게 토닥인다. 이것이 우리 연이의 새로운 세계라면 기꺼이 기다려주리라. 언제나 답은 아이에게 있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최선을 다해 육아하고 있다.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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