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말은 못해도 생각은 다 해요!”
“엄마, 말은 못해도 생각은 다 해요!”
  • 칼럼니스트 김정은
  • 승인 2018.03.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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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그림 엄마글] 말트임이 늦었던 딸의 그림 이야기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세 살 수린이가 일곱 살 수민이 허벅지를 물었습니다.

“으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나서 달려 가봤더니 수민이 허벅지에 새까만 멍이 들게 생겼습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처음엔 살짝 깨무는 정도였습니다. 점점 강도가 세지더니 피멍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린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주었습니다. 한번만 더 물면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도 놓았습니다. 어째 수린이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입이 댓 발은 나왔습니다.

때마침 퇴근한 남편이 들어왔습니다. 수민이는 동생한테 물린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수린이가 언니를 물어서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수민이 한번 저 한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곧바로 수린이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수린이, 말을 못해서 힘들었구나. 언니처럼 말을 잘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와서 많이 속상했구나.”

수린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막 들어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서 있는 아빠 다리에 얼굴을 묻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엄마와 수민이는 괜스레 미안해져서 수린이 엉덩이를 쓰다듬어 줬습니다.

수민이는 말이 빨랐습니다. 돌이 지나자마자 두 단어 세 단어 문장을 만들어서 말을 했고, 책을 읽어준 것밖에 없는데 두 돌이 되자 한글을 줄줄 읽고 글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다섯 살이 돼 영어 그림책을 읽어줬더니 영문도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수민이가 일곱 살일 때 직장을 그만둔 저는 한 가지를 알려주면 열 가지를 알아듣는 게 신통방통해 시간만 나면 한글 책이건 영어 책이건 다 읽어줬습니다. 수민이가 일곱 살, 수린이가 세 살이었던 어느 날,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깨친 수민이가 일본 그림책을 줄줄 읽게 되자, 수린이는 수민이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수민이 다리에 피멍이 들고 나서야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수민이가 3개국어를 하는 사이에, 수린이는 우리말 한 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 정도 말 할 수 있었던 수린이는 말을 잘하는 언니가 밉고 말 잘하는 언니만 챙기는 엄마도 미웠을 겁니다. ‘나를 좀 쳐다봐 달라고, 나도 좀 챙겨달라고’라며 울고불고 온 몸으로 표현해도 엄마가 알아듣지 못하자 언니를 물었을 겁니다.

“수린이에게 스케치북을 사 줍시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세 살 수린이에게 크레파스를 쥐어줬습니다. 수린이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수민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수린이도 어딘가에 다니고 싶어 했습니다. 어린이집에 보냈다가 친구를 물면 어쩌나 고민이 돼 망설였습니다. 일부러 공부는 하나도 시키지 않는 어린이집을 골랐습니다. 다행히 수린이는 친구는 물지 않았고 어린이집에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매일매일 열심히 그렸습니다.

수린이 자화상(8세 작품). ⓒ유수린
수린이 자화상(8세 작품). ⓒ유수린
엄마 초상화(8세 작품). ⓒ유수린
엄마 초상화(8세 작품). ⓒ유수린

수린이는 다섯 살이 돼 말문이 트였습니다. 자주 하는 말이 바로 “언니는 똑똑한데 나는 왜 안 똑똑해?”였어요.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저는 “언니는 말을 잘 하고, 수린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누구나 잘 하는 게 하나씩은 있지!”라고 말해줬어요. 다섯 살이 되어 팔 힘이 세진 수린이는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러 가지 미술 도구가 있는 아파트 상가 2층의 미술 교습소에 다니고 싶어 했어요. 일주일에 한번 교습소에 가면 선생님은 수린이가 그만 그리겠다고 할 때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셨어요. 일주일치의 피로를 싹 풀고 돌아온 수린이의 얼굴은 달처럼 환했답니다.

말문이 트이고 나니까 한글 읽기가 수린이의 최고 고민거리가 됐어요. 여섯 살이 되고 일곱 살이 돼도 한글은 알쏭달쏭 알 듯 말 듯 수린이의 속을 썩였어요. 속상할 때마다 수린이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등학생이 되어 매주 금요일마다 치르는 받아쓰기 시험은 정말 너무너무 수린이를 힘들게 했어요. 힘들 때마다 수린이는 그림을 그렸어요. 매일매일 열심히 그렸어요.

초등학교 1학년이 다 지나갈 때쯤 한글 읽고 쓰기가 조금 쉬워졌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다 지나갈 때쯤 한글을 술술 읽고 글도 줄줄 쓰게 됐습니다. 그 사이 수린이의 그림 실력은 아주 많이 좋아졌고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수린이는 그동안 자기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엄마, 이 그림이 뭘 이야기하는지 한번 들어보실래요?”

아아... 수린이가 그린 그림에는 제가 상상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세 살, 네 살 말을 못 하는 아이가 어떻게 이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머리로 하는 생각들이 말로 나오지 않으니 아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 짐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대하는 듯 했으니 아이는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엄마, 말은 못해도 생각은 다 해요!”

‘딸그림 엄마글’은 네 살 때부터 아홉 살 때까지 말과 글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던 그 시간동안, 아이가 그린 그림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 엄마가 글을 쓴 그림 에세이입니다. 아이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그림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아이의 마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노력한 흔적입니다. ‘딸그림 엄마글’과 함께, 내 아이를 이해하고 더불어 엄마의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귀한 시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딸그림' 수린이는요. 오직 아름다운 것에만 끌리는 자유영혼의 소유자이며,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열 살 어린이랍니다.

'엄마글' 수린이 엄마는요. 수민, 수린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이들과 보낸 일상을 글로 남기는 걸 좋아한답니다.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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