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가 책 꽂으라고 했지?!"
연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잡아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말투, 목소리톤, 발성, 허리춤에 손을 얹거나 장난감을 가리키는 몸짓까지. 기시감이 아니다. 이건 나의 축소판이다. 연이가 나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렇게 놀라운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면에선 조금은 얄밉기도 하다. 연이를 부를까 하다가 어찌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윤우! 보던 책은 책꽂이에 꽂고 새로 꺼내 와야지!! 이게 뭐야?!” 아이답지 않게 뱃심에서 나오는 듯한 '호통'이 이어진다. 여느 때처럼 놀던 윤우가 놀란 토끼눈이 돼 뒤돌아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이다.
‘아따’는 연이의 다른 이름이다. 윤우는 말문이 트일 때부터 연이를 아따라고 부른다. 그런 아따를 바라보는 윤우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아따는 엄마인가, 아닌가. 미간에 작은 주름을 잡고 단호하게 서 있는 연이, 책을 빼들다 말고 돌아보는 윤우, 그걸 지켜보고 있는 엄마. 모두가 일시정지된 상태로 잠시 고요하다. 에라 모르겠다, 윤우는 아따가 그러거나 말거나 하던 걸 계속 하기로 했나 보다. 연이의 역할극은 독백으로 싱겁게 막을 내린다. 돌개바람이 지나간 자리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들은 평온히 제 모습 그대로다. 다만 내 눈에만 조금 전 연이의 잔상이 좀처럼 가시지 않을 뿐이다.
엄마가 된 후 나는 늘, 연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랑을 퍼붓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때는 연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표현해 주고 있는지 헷갈린다. 사랑에 황금률이 있다면 딱 그만큼이면 좋겠지만, 나는 또 어디에서 넘치고 어느 쯤에서 부족했던 걸까. 오늘 연이는,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만 넘쳐 버린 며칠 전의 나였을 것이다.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우기고 싶지만 연이에게는 무서운 잔소리로 들린 모양이다. 그런 얼굴과 말투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고 에둘러 보여주는 연이. 아이가 느끼지 못하는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면 며칠 전 그 순간을 삭삭 지우고 다시 채우고 싶다.
먼 나라, 살면서 한 번은 갈 수 있을까 싶은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게는 잘못을 한 사람을 깨우치는 특별한 방식이 있다고 한다. 모든 부족 사람들은 이틀 동안 돌아가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동안 그가 해왔던 좋은 일들을 조곤조곤 말해준다. 그 사람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일깨워주는 나름대로의 의식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사랑과 평화를 바라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다만 때때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 잘못한 사람이 착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데에는 부족원들의 이런 믿음이 숨어 있다. <흔들리지 않는 육아>를 쓴 '부모교육가' 수잔 스티펠만은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부족처럼, 아이를 호되게 꾸짖기보다 그만의 착한 점을 부드럽게 일깨워주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느 상황에서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면 잘못된 행동을 깨닫고 차차 고쳐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믿음에 얼굴이 있다면 아마도 부드러움을 품고 있을 테다. 익히 알고 있듯 <해님과 바람>에 나오는 해님의 미소처럼, 부드러움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마침표를 찍는다. 믿는다는 것, 쉽고도 어려운 일을 나는 평생에 걸쳐 우리 연이에게, 윤우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어느덧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으면 아이를 키우는 일도 이와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운전은 하다 보면 초보 딱지를 떼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드는 때가 오는데 육아에는 그런 때가 좀처럼 오지 않는 까닭이다. 특히나 매번 처음을 함께 하는 첫째에게는, 아무리 연차가 쌓인다 해도 엄마는 초보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엄마인 나 자신에게도 쉽게 부드러운 얼굴을 할 수가 없었나 보다.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되고 싶은 모습에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중얼거려 본다. 우리에게는 다음이 있고, 나도 연이도 내일은 더 성장해 있을 테니까. 믿음은 차차 그만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흔들리는 육아’를 하는 나같은 엄마는 믿음의 느긋함에 애가 타고도 남겠지만, 그래도 부드러운 ‘엄마 미소’는 애써 잊지 않기로 한다. 아이들은 그 무엇보다도 기분 좋게 ‘육아 마침표’를 찍고 싶은 나의 소중한 미래이므로. 이쯤 되면 내가 연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연이가 나를 키우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최선을 다해 육아하고 있다.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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