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했던 아이
비오는 날을 유난히 좋아했던 아이
  • 칼럼니스트 김정은
  • 승인 2018.03.2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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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그림 엄마글] 말트임이 늦었던 딸의 그림 이야기

세 살 수린이는 비를 좋아했습니다. 비가 올 때를 대번 알아챘습니다. 코를 킁킁대며 입으로 푸푸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비가 오곤 했어요. 촉촉한 공기를 마시면 작은 몸에서 힘이 불끈하고 솟는 것 같았어요. 엄마 다리를 붙들고 밖에 나가자고 소리를 질렀어요. 

언니가 입던 파란색 비옷을 입히면 홀딱 벗어서 집어던졌어요. 수린이는 자기가 직접 고른 옷이 아니면 절대 입지 않았거든요. 마트 서너 군데를 돌아 수린이 맘에 쏙 드는 꽃무늬 비옷을 만났어요. 비옷을 입지 않고 놀다가 감기에 걸려 고생한 적이 있어서 비가 오면 꽃무늬 비옷부터 챙겼답니다.

일찍 일어난 수린이가 “우우……” 소리를 반복하는 걸 보니 봄비가 내리나 봅니다. 꽃무늬 비옷을 입히고 유모차에 태웁니다. 유모차도 비옷을 입습니다. 일곱 살 수민이는 비옷을 입지 않습니다. 비옷을 입으면 온몸으로 비를 느낄 수 없다나요? 큰 우산도 챙깁니다. 엄마는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고 다른 한손으로는 우산을 들어야 합니다. 목디스크 치료를 받는 저는 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립니다.

“엄마는 비가 안 좋아?”

엄마 표정을 금방 읽어내는 수민이가 물었습니다.

“아니야. 엄마도 비 좋아해.”

유치원도 학원도 다니지 않는 일곱 살, 세 살 두 아이는 텅 빈 놀이터에서 오전 내내 비 친구와 놉니다. 물기를 머금은 모래 바닥에 부러진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립니다. 지렁이 친구를 만나고 달팽이 친구도 만납니다. 두 아이는 꼬물꼬물 지렁이 흉내를 내고 느릿느릿 달팽이 흉내도 내며 깔깔댑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쪼그려 앉아 노는 아이들 뒤에서, 엄마는 큰 우산을 들고 서 있습니다. 팔이 아픈 것도 잊고 웃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4세). ⓒ유수린
비오는 날(4세). ⓒ유수린

네 살 수린이가 어린이집에서 비 오는 날의 가장 기억나는 장면을 그렸답니다. 아이는 큰 우산을 들고서 웃고 있는 엄마를 그렸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아이 그림에 비 오는 날의 주인공들이 등장할 줄 알았습니다. 꽃무늬 비옷과 지렁이 친구, 달팽이 친구를 그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배경처럼 서 있던 저를 그렸습니다.

“엄마, 팔이 아픈데도 우산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열 살 수린이가 말했습니다.

아아, 세 살 수린이도 다 알고 있었나 봅니다. 엄마가 팔이 아파서 직장을 그만둔 것과 비 오는 날에는 더 아파했다는 것을요. 일곱 살 수민이가 “엄마 팔 아프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타일러도 더 놀고 싶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큰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마음가득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비 오는 날 저녁이면 제 등에 달라붙어 팔을 어루만지던 세 살 아이의 손길이 떠올라 새삼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나무랑 꽃이
목이 마르면
비가 오지요.

다섯 살에 말문이 트인 수린이가 말했습니다.

수민이 수린이
함께 놀자고
비가 오지요.
  
다섯 살 수린이 말에 저도 맞장구를 치곤했습니다.

열 살 수린이는 이제 비가 싫습니다. 비가 오면 학교 가기 불편하고 친구들과 놀지도 못한다고 투덜댑니다.

“수린아, 비 오는 날 기억나?”

네 살에 그린 ‘비오는 날’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간 아이가 말합니다.

“으응. 비 오는 날 좋았지. 알록달록 큰 우산을 쓸 수 있어서 좋았고, 우산 아래에서 톡톡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어. 물웅덩이에 비가 내리면 동글동글 동그라미를 만들잖아. 그걸 보는 것도 재밌었고……. 음,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것도 좋았어.”

봄비가 내립니다. 네 살로 돌아간 수린이에게 말을 겁니다.

“우리, 나가 볼까?”

오늘은 우산을 각자 하나씩 들고 나가보렵니다. 오랜만에 비 친구와 놀아보렵니다.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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