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최규화 기자】
“어떤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으면 과연 서로 깊이 공감하고 연결되는, 마음을 유지하는 대화가 가능할까요? 아마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사랑하는 자녀와 대화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이 생각과 판단을 잠시 거두고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대화의 시작입니다.” - ‘엄마의 말하기 연습’(박재연, 한빛라이프, 2018년) 85쪽
다섯 살 딸아이와의 대화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했더니, 원인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건 바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고 늘 ‘판단’하려 했던 내 태도 때문이었다. 아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 가르치고 훈육하겠다는 욕심이 앞선 탓이다. 박재연 리플러스인간연구소 소장이 지난 2월 펴낸 책 ‘엄마의 말하기 연습’을 읽고 나서, 나는 ‘판단하지 말고 관찰하라’라는 문장으로 이 책에서 얻은 메시지를 요약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리플러스인간연구소에서 박 소장을 만났다. 기업인, 부모,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상호존중 대화훈련 프로그램인 ‘연결의 대화’를 가르치고 있는 박 소장은 국제아동인권센터 아동인권옹호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 소장은 대화의 가치와 방법에 대한 이야기부터, 대화를 가로막는 폭력의 그늘에 대한 이야기까지 폭넓은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특히 엄마아빠가 ‘대화’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선 자기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모든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서기 위해서”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다음은 박 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Q. 그냥 ‘당연히 중요하다’고는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부모와 아이의 대화, 왜 중요한가요?
“이유는 딱 하나예요. 사람의 기억에는 부정편향이 훨씬 더 강하게 남거든요. 어른한테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건들이 아이한테는 일생을 두고 기억난다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전달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 즉 아이의 기억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은 부모가 아이와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어요. 많은 부모들이 이걸 힘들어하지만, 이건 포기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할 대상이에요.”
Q. 아이와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부모의 마음속에 있는 ‘화’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를 통제하는 방법, 무엇이 있을까요?
“통제 대신 표현이라는 말을 써야 할 것 같아요. 화는 통제하거나 억압할수록 굉장히 거칠게 나오게 돼요. 케첩 짜기 같죠.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으로 하트를 그리려면 살살 짜야 되잖아요. 확 짜버리면 절대 그릴 수도 없어요. 화도 참고 참다가 터질 때 표현하는 게 아니라, 약간 불편할 때 그때그때 얘기해야 돼요. ‘엄마는 이런 게 좀 불편해’라고 표현해야죠. 그리고 평소에 ‘화’라고 여기는 감정이 화가 아닌 경우도 많아요. 무서움, 걱정, 거북함, 민망함 같은 다른 감정이 아닌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인식하는 연습을 해야 돼요.”
◇ “거짓말 시작한 아이, 부모 머릿속 읽는 능력 생겼다는 뜻”
Q. 책에서 ‘관계의 질은 자기 인식의 수준으로 결정된다’는 말씀이 굉장히 와닿았습니다.
“대화는 들리고 보이지만,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결정돼요. 판단, 비난, 강요, 비교, 당연시, 책임회피와 합리화라는 엄마들의 흔한 패턴은 모두 생각의 결과물이에요. 자동적 생각의 결과가 곧 대화죠. 이 자동적 생각은 ‘생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이걸 ‘진실’이라고 믿을 때 갈등이 일어나요. 내가 지금 아이를 판단하고 있구나, 비난하고 있구나, 라고 자기 생각을 인식할 때 진짜 대화를 할 수 있어요.”
Q. 부모들, 특히 아빠들은 ‘훈육자’의 권위를 스스로 너무 강조한 나머지 아이에게 ‘고마워’ 같은 감정표현의 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아이들도 자기가 뭔가 잘할 때 칭찬받는다는 걸 알아요. 그건 평가받는 거거든요.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에서 마음을 전달하는 거예요. 고맙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우면 묘사만 해줘도 돼요. ‘묘사의 선물’이란, 부모들이 아이에게 고마웠던 일을 본 대로 들은 대로만 다시 전달해줘도 아이는 그날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며칠 전에 아빠 허리 아플 때, 아빠가 부탁도 안 했는데 네가 허리 주물러주더라.’ 그러면 아이가 그날로 돌아가서 아빠 허리 주물러준 순간을 떠올려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Q. 아마 직장생활에 바쁜 아빠들 중에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이와 대화를 하려고 해도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아빠는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왜 말을 못해요? 아이들도 부모가 오늘 뭘 했는지 관심이 많은데, 우리는 어른들의 일이라고 얘기를 안 해요. 오늘 아빠한테 있었던 일 가운데 작게라도 하나를 찾아서 얘기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힘든 일 없었니?’ 이런 질문은 별로 좋지 않겠죠. 아이가 그걸 또 떠올려야 하니까요. ‘아빠는 네가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네 얘기를 듣는 게 참 좋아’라고 얘기해주는 것도 중요해요. 물론 그렇게 얘기를 시작했으면, 5분만이라도 온전히 시선을 맞추고 끝까지 들어줘야 하고요.”
Q. 책에서, ‘나중에’라는 모호한 말에는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말씀을 읽고 정곡을 찔린 듯했습니다. 이런 말들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궁금합니다.
“부모도 리더십이 필요한데, 리더십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요. 진정성, 신뢰, 상호존중. 내가 이 순간을 빨리 모면하는 것보다 아이와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면, 조금 불편하고 소통의 비용이 들더라도 아이한테 안 되는 건 왜 안 되는지 얘기해줘야죠. 물론 아이가 떼쓰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는 부모의 ‘나중에’라는 말을 기억하듯이 ‘안 되는 이유’를 분명 기억할 거예요.”
Q.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라는 말을 책에 인용하셨더군요. 신선한 말씀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우선 엄마아빠의 머릿속을 읽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이에요. 엄마가 ‘너 케이크 먹었니?’라고 물으면, 아이는 엄마의 말과 표정을 통해 ‘엄마는 내가 케이크 먹은 걸 모르고 있구나’라고 마음을 읽는 거예요. 마인드 리딩, 공감능력에서 중요한 거죠.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의 마음과 태도와 행동을 셀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는 꼭 필요한 능력이에요. 단, 거짓말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이해시키고, 다시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해요.”
◇ “사랑의 의도 있어도 존중의 태도로 안 드러나면 효과 없다”
Q. 먼저 내신 두 권의 책들도 그랬고, 이번 책 역시 인세 전액을 학대피해 아동들을 위해 쓰기로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소장님의 경험이 영향을 준 거라고 봐도 될까요?
“맞아요. 어릴 때 제 정서를 생각해보면 우울이나 분노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내 옆에 누가 있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학대를 당하고 있는 많은 아이들이 있거든요. 어린 시절 내가 힘들었을 때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줬다면 내 우울과 분노가 좀 덜하지 않았을까. 돈이라는 것은 도움의 한 형태예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거고요. 진짜 어려운 건 아이와 같이 있어주는 거예요. 제가 돕는 곳에 있는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그 고통 속에 같이 있어줘요. 제가 하는 일이 큰일은 아니에요.”
Q. ‘사랑의 매’라는 것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맞을 짓 하면 맞아야지’라는 생각을 훈육의 철학으로 갖고 있는 부모도 많고요. 그런 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지요?
“묻고 싶어요. 본인도 잘못하면 맞을 거냐고, 본인도 뭔가 배울 때 얻어맞아야만 배울 수 있냐고. 그렇다는 사람 하나도 못 봤어요. 아이들한테 매를 드는 솔직한 이유가 뭔가요? 그게 가장 확실하고 손쉽기 때문에 그걸 선택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내가 맞고 자라서 이만큼 잘됐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맞지 않았다면 당신은 더 잘됐을 겁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는지 묻고 싶어요. 아이를 때리는 데 쓸 에너지를 아이와의 대화에 쏟는다면 방법은 있다고 생각해요.”
Q. 책에 ‘어떤 일을 하는지보다 그 일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이 중요하다’고 쓰셨습니다. 아이와의 대화에 임하는 부모의 ‘태도와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짚어주시죠.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감사’는 서로의 삶에서 모든 것이 당연해질 때 없어져요. 제가 예전에 건강검진을 했는데 암인 것 같다고 해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아무한테도 말을 못했어요. 그런데 일주일 동안 아들을 바라보는 제 자신이 너무 변하는 거예요. 그 뒤로 저는 거의 매일 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데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내 아이에게 어떻게 할까’ 그러면 모든 게 굉장히 명료해져요. 죽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가끔은 꺼내봐야 할 말 같아요.”
Q. 독자들에게 ‘다른 내용은 다 잊더라도 이 한마디는 꼭 기억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사랑의 의도가 있어도 존중의 태도로 드러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부모는 당연히 아이를 사랑하죠. 그런데 ‘아이를 존중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부모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거든요.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 그 사람을 객체화, 대상화 시킨다는 거예요. 부모와 아이가 존재로서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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