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머릿 속을 맴도는 딸아이의 질문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머릿 속을 맴도는 딸아이의 질문
  • 칼럼니스트 김정은
  • 승인 2018.05.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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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그림 엄마글] 말 트임이 늦었던 딸의 그림이야기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초등학교 1학년 ‘자기소개 하기’ 숙제를 하다 말고 아이가 불쑥 물어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반 친구들 앞에서 자기소개 하기는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잘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엄마 어릴 땐 어땠냐고 이야기를 들려 달랍니다.
 
“내 이름은 유수린이야. 화가가 되고 싶어서 매일 그림을 그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제가 먼저 모범을 보였습니다. 아이는 맘에 들었는지 거울 앞에서 엄마를 따라했습니다.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아이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1학년이었을 때로 돌아갑니다. 집 밖에서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아이,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아이, 말을 걸기라도 하면 볼에서 귀까지 새빨개지던 아이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내성적이었던 아이가 엄마가 돼 아이 앞에서 큰 소리로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의 초여름, 저는 전학을 갔습니다. 새 학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버스로 세 정류장이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등교해야 했습니다. 하굣길에 전학생이 길을 잃어버릴까 봐, 담임선생님께서는 반에서 가장 똑똑하고 예의 바른 남학생을 한 명 붙여 주셨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을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 일주일 동안 그 남학생과 저는 손을 꼭 잡고 걸어야 했습니다. 어색해서 뻣뻣하고 더워서 땀까지 줄줄 흐르는 손을 차마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매너도 좋아서 인기가 많았던 그 남학생과 손을 잡고 다녔다는 건 같은 반 여자 친구들의 미움을 받기에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일주일 후, 집으로 가는 길은 알게 됐지만 저는 혼자가 됐습니다. 하굣길 먼 길을 혼자 걸을 때면 오직 햇살 한 자락과 바람 한 점만이 조용히 말을 걸어 올 뿐이었습니다. 햇살 한 자락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바람 한 점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그때 알았습니다.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 새 집이 보이곤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있을 때면, 두 손을 마주 대고 비벼 손 끝 온기 친구를 불러냈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어주고 길을 안내해주던 고마운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입 안 가득 내뱉지 못한 말들을 일기장에 털어놓곤 했습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가끔 일기장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은이는 시인이구나!’

“으응. 엄마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

엄마(8세 때의 그림). ⓒ유수린
엄마(8세 때의 그림). ⓒ유수린

수린이가 그림 선물을 내밀었습니다. 엄마를 그렸답니다. 그림 속 제 모습이 제법 그럴싸합니다. 평소에 하지 않는 아이섀도와 립스틱을 바르고, 무늬가 있는 치마와 레이스 달린 재킷을 차려 입었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서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머리 위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는 아직 지지 않은 어릴 적 꿈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한 손에는 책이 들려 있습니다. 엄마가 쓴 책이랍니다. 뒤에는 빨간색과 흰색으로 장식한 화려한 포토 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유명 영화배우들이나 설법한 포토 존에서 이제 막 작가로 데뷔한 엄마가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연필, 지우개, 압정, 핸드폰, 노트, 클립, 집게, 필통 모양을 한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합니다. 찰칵찰칵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란 색 꽃들이 팝콘 터지듯 팡팡 피어납니다.

아아, 그림 속에 아이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림으로 엄마에게 어릴 적 꿈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끝이 찡해집니다. 그림을 액자에 끼워 책상 앞에 걸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다시 아이만 했을 때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다시 햇살 한 자락과 바람 한 점, 손 끝 온기 친구를 불러내야겠습니다. 잊힌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야겠습니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가야겠습니다. 언젠가 어릴 적 꿈을 이루는 날이 온다면, 제 손에 시집 한 권이 들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글 쓰는 엄마입니다. 다년간 온가족이 함께 책을 읽은 경험을 담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2016)과 엄마와 두 딸의 목소리를 담은 「엄마의 글쓰기」(2017)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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