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정가영 기자】
“너도 저런 며느리처럼 사는 건 아니지?”
미혼인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무슨 소린가 싶어 봤더니 TV프로그램의 캡처화면도 함께 있다. 대한민국 모든 며느리의 분노와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속 장면들이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만삭의 며느리, 며느리에게 “야!” “너!”를 연발하며 손자 교육에 참견하는 시어머니, 며느리 출산 방식을 간섭하는 시아버지의 모습까지. 친구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거 실화냐? 이래서 내가 결혼을 안 하는 거라고!” 친구의 씩씩거림이 핸드폰을 타고 내게로까지 전해오는 것 같았다.
결혼을 앞두고 나도 ‘저렇게’ 살까 꽤 걱정했다. 남편 집은 종갓집이었다. ‘종갓집?’ 종갓집이라곤 김치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였다. 남편은 유교적인 문화가 강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남편의 할아버지께서는 생전 갓을 쓰고 다니셨다고 한다. ‘엥?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충격적이었던 건 제사가 일 년에 네 번, 명절까지 합치면 여섯 번이라는 사실이었다. 일 년에 한 번 할아버지 기일에 조촐하게 예배를 드려왔던 우리 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거기에 남편은 누나가 둘인 막내아들이었다. 주변에선 “시집살이 단단히 하는 거 아니냐?”라는 탄식이 쏟아졌다.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 들어가 살기로 결정하면서 걱정은 더해졌다. 물론 시댁은 2층, 신혼집은 1층으로 분리돼 있었지만 한 지붕 아래 아닌가! 시댁은 멀면 멀수록 좋다던데, 잘한 선택인가(결혼까지도) 싶었다.
무엇보다 두려웠고 겁이 났던 건 며느리가 되면서 요구되는 의무가 내게도 자연스럽게 강요될까 하는 것이었다. 길지 않은 생을 살았지만 자라면서 직간접적으로 줄곧 봐왔던 며느리라는 자리는 내키지 않은 자리였다. 온갖 부당한 대우는 다 받으면서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홀로 끙끙 앓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될까, 나도 시집살이 당할까 무서웠던 것 같다.
햇수로 결혼 6년 차에 접어든 나는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렇게 살진 않아.” 나의 며느리 삶은 어땠을까? 걱정보다 수월했다. 깐깐한 시어머니와 얄미운 시누이도 없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새 식구도 들어왔는데 제사를 없애야 한다”고 투쟁하셨다. “조상복 받으려면 모셔야 한다”는 시아버지와 팽팽한 접전 끝에 기제사는 몰아서 한 번, 명절 두 번으로 지내기로 했다. 시어머니께서는 며느리 귀에 대고 “나중에 다 없애버리자”고 속삭이셨다. 제사 투쟁이 끝나지 않음을 예고하신 것.
또 시부모께서는 한 지붕 아래 사는 아들 내외 집에 무턱대고 찾아오시지도 않았다. 반찬을 갖다 주실 때는 아들집 문 앞에 반찬통을 놓고 가셨다. 우렁각시처럼 말이다. 며느리에게 “야!” “너!”라고 말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늘 “새아가~”라고 부르셨고, 그 아가가 진짜 아기를 낳은 이후에는 “며늘아가”라고 부르신다.
주변 사람들은 “시댁 잘 만났다. 그런 시댁 어디 없다”며 나를 ‘복받은’ 며느리라고 말한다. 물론 며느리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해주셔서 감사하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같은 시집살이를 당하는 않는다고 해서 며느리 자리가 행복한 건 아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아 있고 우리 시댁도 마찬가지다. 며느리인 나는 여전히 시댁에 가면 주방으로 달려간다. 상차림 후 설거지도 내 몫이다. 명절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꼭 시댁부터 가야 한다.(올해는 바꿔볼까?) 시댁 행사에는 꼭 함께하길 바라시는 시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고, 애교 있고 싹싹한 며느리였으면 하는 기대를 맞춰드려야 하나 고민한다.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우리 때는 그렇게 안 키웠는데”라는 소리를 들으며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며느리에 대한 기대감은 더디 변하는 중이고, 며느리의 의무도 여전히 강요된다.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납득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젊은 며느리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의무라고 여기며 자라셨고 그 의무를 다해 살아오신 분들을 향해 며느리가 나서서 “NO”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다. 수십 년을 이어온 집안의 문화를 바꿔나가는 건 한계가 있다. 때문에 며느리는 여전히 부당하다고 느끼고 답답함을 호소한다. 복 받았다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가 아직까지 이상한 나라 속 며느리 처지에 놓이지 않는 건 남편 때문이다. 적어도 남의 편이 안 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남편은 결혼 후 “제사의 형식을 없애자” “피자만 놓고 제사 지내는 집도 많다”며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다른 남자 식구 모두가 밥을 먹어도 여자들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같이 먹자”며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린다. 그게 아내인 나를 포함한 시어머니여도 마찬가지다. 시부모님께서 갑작스레 식사를 하자고 하셔도 “아내와 스케줄 상의하고 말씀드리겠다”며 내 의사를 꼭 묻는다. 차례를 지낸 후에도 “처가댁에 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서는 남자다. 100% 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시댁 식구라는 이유로 며느리에게 강압적인 요구를 할 수 없도록 중재자 역할을 도맡는다. 그렇다고 아내의 입장만 생각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효자 소리 들을 정도로 아들 역할도 잘 해낸다. 속으로는 얼마나 힘들까 싶지만, 남편은 늘 아내의 마음,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한다.
고부갈등, 시댁과의 갈등을 부추겼던 건 다름 아닌 제일 믿고 의지해야 했던 남편의 방관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남편이 남의 편이 될 때 시댁과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이상한 나라의 사위를 만들 수도 있다. 낡고 부당했던 문화를 바꿔야 하는 과도기에 우리가 있다. 남편이 방관자가 되지 않는다면 부당함을 호소하는 이상한 나라 속 며느리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정가영은 베이비뉴스 기자로 아들, 딸 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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