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를 대하는 엄마의 자세
숙제를 대하는 엄마의 자세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05.2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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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우리가 함께 하는 '어떤' 분위기

숙제, 그리고 나의 이야기

초등학교 2학년, 첫날. 선생님께서 1부터 1000까지를 숫자와 글자로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숫자는 금세 썼는데 글자로는 진도가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삼백사십구, 삼백오십... 저녁 먹기 전부터 숙제를 시작했지만 깜깜한 밤이 되어도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어린 마음에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준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선생님이 숙제를 많이 내줬으니 엄마라도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영악한 마음이 나를 흔들었다. 그런데 엄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숙제는 스스로 하는 거야" 라는 말만 로봇처럼 반복했다. 숙제양이 많고 적은 건 엄마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숙제를 하다가, 짜증을 내다가, 울다가 나는 겨우 팔백육십사, 팔백육십오... 그 즈음을 쓰다 잠이 들고 말았다. 선생님께 혼나는 상상보다 눈꺼풀이 더 무거웠던 아홉 살의 어린 나. 

다음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갔더니 모두들 나처럼 숙제를 다 못 했다고 아우성이었다. '나만 숙제가 많다고 느끼는 게 아니었어!', '내가 못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숙제를 잘못 내주신 거야!' 어젯밤의 주눅 든 아이는 어깨를 쭉 펴고 선생님이 들어오시기를 태연히 기다렸다. 수많은 아군들과 함께하는 기분이 꽤 든든했다. 선생님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숙제 다 해 온 사람?" 하고 웃으며 물으셨다. 선생님의 질문이 포물선을 타고 떨어지는 순간, 우리들의 눈도 일제히 긴 꼬리를 그리며 한 아이에게서 멈추었다. 은희가 조용히 손을 들었던 것이다. 우와, 그 많은 숙제를 다 한 친구가 있다니. 누군가 나와 은희를 대놓고 비교하지도 않았는데 손을 번쩍 든 은희 앞에서 '졌다'는 생각을 해버렸던 것도 같다. 

선생님은 "혼자 다 한 거니?" 하고 인자하게 물으셨다. 그러자 은희는 "아빠가 조금 도와주셨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 솔직한 대답에서 어찌됐든 반 아이들 중 혼자(!) 숙제를 다 해왔다는, 당당함이 한 줌 묻어났다. 선생님께서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순간, 은희가 부러웠다. 어젯밤 우는 나를 내버려두는 야속한 엄마가 생각났다. '분명 내 수준에서 할 수 없는 숙제였는데... 엄마가 도와주었으면 숙제를 끝까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선생님이 나도 기특하게 생각하셨을 텐데....' 교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들떴던 기분은 고개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그날 이후로도 어떤 숙제든 도와주는 법이 없었던 엄마, 아빠 밑에서 왜인지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숙제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걸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해내지 못할 만큼 많은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은 다행히 없었다. 

연이의 숙제를 대하는 나의 자세

연이가 유치원에서 한글 숙제를 가지고 오면서부터 내가 하는 일이라곤 유치원 가방에서 식판과 물병을 정리하면서 숙제를 꺼내주는 것뿐이다. "숙제 해야지~" 하면 연이는 당연한 듯 식탁에 앉는다. 궁금한 걸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지만 글씨를 반듯하게 써야 한다든지, 예쁘게 다시 쓰라든지 간섭하지 않는다. 연이가 숙제를 다 했다고 하면 그걸 그대로 받아 다시 가방에 넣는다. 종종 'ㄱ'이나 'ㄷ' 같은 걸 거꾸로 쓰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표시를 하고 연이에게 알려주시니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연이의 외할머니, 우리 엄마에게 '당한 대로' 연이의 숙제를 봐주고 있는 것이었다. 젊었던 그 시절의 엄마가 내 모습과 자꾸 겹쳤다. 대개 아이를 키우며 애증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떠올리곤 하니까, 그런 경험을 자꾸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치는 바람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듯, 그 모든 일이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한글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자 한자 숙제가 추가되었다. (연이는 숲 유치원에 다닌다. 일곱 살이 되니, 유치원에서 실컷 놀고 대신 약간의 숙제를 집으로 가지고 온다.) '어머, 우리 연이가 한자도 배우는 구나' 걸음마를 익히기 시작한 아이를 보는 것처럼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는 한글 숙제와 함께 꺼내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여느 때처럼 연이는 노는 둥하며 숙제를 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아이들이 잠든 밤. 조용한 거실로 나와 보니 시끄럽고 정신없었던 시간에는 보이지 않던 연이의 한자 숙제가 눈에 띄었다. '참, 연이가 숙제를 하고 자는 걸까?' 중요한 일을 깜박한 것처럼 조금 놀란 가슴으로 한자 책을 펼쳐보았다. 별이 표시된 바닥이 엄마 보란 듯이 채워져 있었다. 잘못 썼다고 생각했는지 지우고 다시 쓴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야 할 일을 해놓은 연이가 사랑스러웠다.

'선생님이 보시면 엄마가 다시 쓰라고 시켰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런 오해를 받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연이는 모든 획들을 스스로 지운 후, 알아서 다시 썼다. ⓒ신은률
'선생님이 보시면 엄마가 다시 쓰라고 시켰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런 오해를 받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연이는 모든 획들을 스스로 지운 후, 알아서 다시 썼다. ⓒ신은률

가풍이라는 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만들어지는 분위기 같은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보면, 같은 병원에서 같은 날에 태어난 두 사내아이의 부모가 바뀌게 된다. 그 사실을 모른 채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피가 섞이지 않은 두 부자는 어느새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나와 아이를 잇는 것은 피인가 시간인가' 하고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보낸 그 시간이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고 감독은 나직이 일러준다. "연이가 만약 다른 집 아이라면 우리도 친자식과 바꾸고 싶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남편에게 물었다. 연이와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들을 뭉클하게 떠올리며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집에서의 연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이 공간에 연이가 없는 것은 더더욱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벅찰 수도, 혹은 가슴 아플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결국은 '시간'이다. 

식탁에 앉아 숙제하는 연이와 간식 먹는 동생. ⓒ신은률
식탁에 앉아 숙제하는 연이와 간식 먹는 동생. ⓒ신은률

연이가 한자 숙제를 받아오면서 나는 내가 어떤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내가 만들고 연이가 받아들이는 규칙. 아니,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함께 하는 분위기. 앞으로도 나는 숙제를 도와주는 일도 간섭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연이도 분명 그런 엄마에 대해 언젠가 서운해 할 것을 안다. 그건 훗날 연이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지나고 나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어떤 숙제든 선생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갓 2학년이 된 아이들에게 해내기 벅찬 숙제를 내준 선생님을, 그 다음날의 너그러움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마도 우선은, 선생님은 앞으로 1년을 함께 하게 될 아이들의 끈기 같은 걸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집에서 부모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짐작해보는 시험 같은 게 아니었을까. 숙제를 도와주지 않은 엄마에게 고마워하리라고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은희에게 '졌다'는 생각이 지금은 전혀 들지 않아서 정말 감사하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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