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하나 낳아야 않겠나,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우신다"
"아들 하나 낳아야 않겠나,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우신다"
  • 칼럼니스트 엄미야
  • 승인 2018.06.21 19:12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미야의 일하는 엄마의 눈으로] 딸들에게 가부장제를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할아버지집 뒷마당 나무쯤이야. 개구쟁이 딸아이들. ⓒ엄미야
할아버지집 뒷마당 나무쯤이야. 개구쟁이 딸아이들. ⓒ엄미야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의 시아버지는 열렬한 남아선호사상 신봉자셨다. 그리고 남편은 딸이 네 명인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그래서 귀하게 자랐냐고? 그건 아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아들’이라는 존재는 ‘무료로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이었던가보다. 사람을 쓰기엔 형편이 여의치 않고, 농사일은 늘 많아 딸보다는 힘을 좀 쓰고, 일도 좀 더 잘 하는 ‘노동력으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소여물 먹이러 다니고, 해질녘 겨우 집에 들어와 숙제 좀 할라치면 전기 값 아깝다고 불을 껐다는 얘길 듣고 나는 참 특이한 ‘아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는 노동력으로 집에 봉사하고, 커서는 꼬박꼬박 집으로 용돈을 부치던 아들은 그래서 아버지의 ‘귀한’ 아들이었다.

나는 그런 집으로 시집을 간 외며느리였고.

그 시절 어르신들이 다 그러셨듯이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셨겠지. 하지만 나는 큰 아이를 계집아이로 낳았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심드렁하게 “미자라고 짓던지”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 ‘미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이후 난 잠시 키웠던 우리 집 개에게 ‘미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만큼 시아버지의 그 때 그 반응이 서운했고 가슴에 오래 남았다. 아니, 귀한 첫 손녀딸 이름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얘기하시다니.

아버지는 큰 아이 돌잔치에 오지 않으셨다. 허리가 아프시다는 건 핑계인 듯 했다. 남편도 아마 핑계일거라고 했다. 둘째 아이 돌잔치에도 오지 않으시는 걸 보고 난 확신했다. “정말 사내아이가 아닌 것이 마음에 안 드시나보군.”

작은 아이를 임신하고 솔직히 “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뱃속의 둘째가 딸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조금은 서운했다. 남편도 시아버지도 서운했겠지. 그래도 남아선호보다 경제적 효용가치를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편은 셋째 낳자는 따위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도 내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진 않으셨다.

둘째 아이가 막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쯤이었을까. 주말, 시댁에 갔다. 잠자리에 막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안에 있냐?”

이웃에 사는 이장님이었다. 남편을 부르는 소리 같았다. “네~”하며 주섬주섬 나갔다 온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 밤중에 왜?” 묻는 나에게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는 참, 뭐라 해야 할까. 우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할아버지 트럭 타고 동네 한바퀴. ⓒ엄미야
할아버지 트럭 타고 동네 한바퀴. ⓒ엄미야

“아들 하나 낳아라. 너희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우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시아버지는 며느리인 나를 무척 아끼고 존중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온 동네가 다 아는 아버지의 소원을 우리 부부에게만 꼭꼭 숨기셨으니.

시아버지는 제사도 신주단지 모시듯 지내셨다. 작은집에서 오지 않아도, 우리도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 말고는 날을 챙기지 않아도 없는 살림에, 바쁜 농사일에도 꼭꼭 모든 제사를 지내셨다. 어느 날 깜빡 잊고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한 날 저녁 아버지 꿈에 할아버지 귀신이 나타나 우셨다고 들었다. 제사는 아버지의 종교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우제가 끝난 날,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면서 남편은 모든 제기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나는 앞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

막내 시누이는 “오빠가 안 지내면 나라도 지내겠다”며 화가 나 울었다. 셋째 시누이가 나에게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언니랑 미리 의논한 거예요?”

잘못하면 시댁에 배후조종자로 몰릴 판이었다. “아뇨.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오~ 오빠 진보적인 줄은 알았지만, 파격적인데~!”

한바탕 형제들과 실랑이가 있었지만 남편의 의지는 명확해 보였다.

“부모님 기일에 형제들이 고향에 찾아오고, 모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 그 이후 모든 제사를 없앴다. 부모님 기일에는 5남매가 모두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면서 밤새 논다. 옛날 사진도 꺼내어 보고, 어릴 적 아버지에게 맞았던 얘기, 지지리 가난해서 찰흙 가져오라고 하면 집 앞 흙을 파서 담아가던 얘기는 귀에 딱지가 질 정도로 들었다.

외며느리인 나도 “그래도 가족이 모이는 데 제사나 차례 같은 형식이 필요하다. 그거라도 없으면 모이겠냐”는 얘기가 혹시라도 나올까 열심히 형제들을 모으고, 나름 챙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버지가 하늘에서 서운해하실까?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시골집 마당에 타프를 치고, 불을 지피고, 형제들이 자식들을 줄줄이 데리고 고기를 굽고 밤새 떠들면 굽은 허리로 계속 마당 정리를 해주시며 흐뭇해하셨다. 그리고 남편의 형제들은 아버지 살아생전 모두 최선을 다하는 효자효녀였다. 살아생전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정을 나누었으니 “돌아가신 뒤 제사 같은 건 필요없다”는 남편의 결정이 나조차 놀랍지만,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시기에도 형제들이 늘 모여 잘 지내고 있으니 귀신이 되어 내 꿈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듯하다.

그리고 나는 아들도 없으니, 설령 우리까지 제사를 지낸들 우리 아이들이 훗날 괜한 고민과 미안함에 빠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딸이라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가부장제의 핵심은 제사의 의무와 함께 상속의 의무가 함께 딸려오는 것인데, 법적으로 엔분의 일 상속이 명확해진 지금 시기에 장자가 제사라는 의무를 지어야 하는 것도 사실 모순적이고.

덧붙여 이 세상 모든 딸들의 기억 한 자락쯤 차지하고 있는 친정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 그 기억이 세대가 바뀌어도 현실에서 여전히 대물림되면 안 되지 않겠나.

나 역시, 밤 늦게 일 마치고 2시간 거리인 시댁에 제사 때마다 가야했던 친정엄마, 그나마 늦게 온다고 할머니에게 구박받고 숨어 울던 우리 엄마, 그런 기억도 이제는 지워내고 싶다. 그리고 내 딸들에겐 그런 기억조차 없기를.

'미자'가 될뻔한 큰아이와 둘째아이. ⓒ엄미야
'미자'가 될뻔한 큰아이와 둘째아이. ⓒ엄미야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아이는 국가가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교육 추종자이며, 꿈이 있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은 따뜻한 낭만주의자이기도 하다. 현재 경기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 민주노총 성평등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금속노조 경기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실시간 댓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lejp**** 2018-06-28 00:12:15
멋지네요... 제가바라는 것인데... 공감합니다

poren**** 2018-06-26 16:01:19
점점 변화되길 기다려야나봐요..
여전히 주변어르신들은 비슷비슷 하시더라구요..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