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을 쓰면서 엄마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나도 어릴 때는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를 외치는, 저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는 딸이었다. 엄마의 결혼 전 모습을 아는 이모들이 종종 “네가 엄마를 닮아 공부를 잘 하나보다”라거나 “엄마도 아침에 눈뜨면 벌써 일어나 공부하고 있었어”라는 말을 전해줬지만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사진첩을 뒤지다가 예기치 못 하게 발견한 젊고 예뻤던 엄마를 보고도 한참을 믿을 수가 없는 그런 낯섦. ‘하늘색 블라우스에 물방울 무늬 주름치마를 입은 날씬한 아가씨가 우리 엄마라고?’ 내 눈에 엄마는 겨울이면 사골을 끓이고 여름이면 수박을 써는 손이 퉁퉁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식구들을 먹이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만 그때는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서도 엄마에게는 인색했다. 나는 엄마와 달리 손에 물 묻힐 일이 거의없는 커리어우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이 재미있게도, 싫다고 하는 건 닮게 설계돼 있나보다. 오래전에 했던 드라마,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 속 남자 주인공이 아버지 모습 그대로였던 것처럼 나는 엄마처럼 전업맘으로 살고 있다. 내색은 자주 안 하지만 엄마는 내가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걸 안타까워 한다. 지금같은 시대에 아이들을 온전히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는 건 너무나 큰 행운과 행복이지만 만약 연이가 내 길을 걷는다면 엄마로서 나도 연이가 안타까울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긍정하지만(때때로 쉽지 않지만) 딸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마음. 항상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자연스러운 마음, 그런 것까지 엄마를 닮았다. 언젠가부터 내가 자라던 집의 소란스러움을 그림책의 한 장면처럼 떠올리게 된다. 그 안에 있는 철없는 나는 여전히 모르지만 그 시절의 젊은 엄마가 지금의 내 눈에는 여자로도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무게가 풍경 속 여자도 무거웠겠지. 스크루지 영감이 꿈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깨닫듯, 어릴적 엄마의 모습이 다시 보일 때마다 고맙고 미안하고, 어쩐 일인지 조금은 서글퍼진다.
얼마 전부터 동네에서 육아서를 읽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육아서에서는 부모에게도 ‘메타인지’가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메타인지’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부모에게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걸 구분하지 못 하면 ‘비교의 늪’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애쓰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에 좀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메타인지’도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싶은가’라는 부모만의 교육 철학과 연결이 된다. 내가 연이보다 조금 더 컸을 무렵,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자주 다녔다. 유리벽 안에 있는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보이고, 박물관 앞마당에서 웨딩 촬영을 하던 예비 부부도 떠오르고, 그곳에 같이 간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노는 모습이 생생하다. 어린이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 배웠던 노래를 아직도 가끔 흥얼거리는 걸 보면 그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은연 중에 나의 일부가 만들어진 것도 같다.
연이가 일곱 살이 되고, 곧 여덟 살을 바라보게 되자,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연이와 함께 미술관에 자주 가게 된다. 연이에게도 좋은 일이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재미있다. 딸과 같은 작품을 보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니. 연이의 표정을 살피고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기대하고, 말로 다 하지 못한 연이의 생각을 궁금해 하는 나만의 시간, 내가 연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이를 키우는 교육 철학이 뭐냐’고 물으면 거창해서 부담스럽지만 실은 ‘어디를 가느냐’, ‘어디를 가고 싶은가’를 따져보면 저마다의 교육관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집집마다 선호하는 교육 공간이 다른 이유다. 좋아하는 특정한 공간에 아이를 풀어놓는 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배맘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이 어릴 때 많이 데리고 다니라고 조언해준다. 조금만 커도 아이들이 엄마아빠를 따라다니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교육관’이 직접적으로 통하는 때도 잠시라는 얘기다. 품에 있을 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실컷 보여주는 게 상책일 것이다. 엄마의 교육관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엄마와 함께 갔던 공간은 쉽게 떠오른다. 내가 아이를 데려가는 공간이 나를 말해주고, 그 속에서 연이는 자랄 것이다. 이번 여름방학이 기대되는 건 그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