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앞 자주 가는 미용실. 동네에 있는 것 치고는 조금 비싼 미용실이지만, 갈 때마다 항상 좋은 약을 써주고 정성껏 관리해준다는 느낌이어서 일부러 더 애용한다. 원장님이 내가 딸을 혼자 키우는 것도 알 정도로 서로 속 얘기를 하는 편한 사이가 됐는데, 어느 날 미용실에 갔더니 어떤 할머니가 오셨다.
딱 봐도 여장부 스타일. 연세가 있으신데도 당차고 씩씩한 느낌이 드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오시자마자 내게 자기가 좋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도 되냐고 살며시 양해를 구하고는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외국 선수들이 잔인하게(?) 혹은 무지 막지하게(?) 싸우고 있는 프로레슬링 채널을 너무나 즐겁게 보는 게 아닌가?
보통 내 주변에는 할머니들은 평일 아침 아침드라마를 시작으로, 저녁에는 저녁드라마, 주말에는 주말드라마, 일요일 점심에는 '전국노래자랑' 정도 보시는 할머니들만 있는데, 프로레슬링이라니? 그래서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할머니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근육질 몸매에 삼각팬티(?)만 입고 긴 갈색 머리를 휘날리면서 거칠게 싸우는 외국선수들의 모습에 미소를 짓고 있는 할머니의 초롱초롱한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할머니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자기는 드라마는 절대 보지 않는다며 이것(프로레슬링)만 보면 정말 재미있다고 얘기하셨다. 할머니 말씀에 나는 할머니의 '개취', 개인취향을 존중한다며, 할머니 진짜 멋있다고,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줬다.
몇 달이 지난 후 어제, 다시 염색을 하기 위해서 미용실에 갔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레슬링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혹시 사랑이 엄마가 할머니한테 레슬링 본다고 뭐라고 했어요?"라고 조심스레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요! 절대요! 대단하다고 멋지다고 했는데요! 제가 어찌 어르신에게 감히 그렇게 버릇없이 뭐라고 하겠어요?"라며 놀라서 되물었다.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나와 만나고 나서 며칠 뒤 다시 미용실에 오셔서 내 욕(?)을 엄청 하셨단다. 그때 그 애기엄마가 자기가 레슬링을 본다고 뭐라고 했다면서, 그 얘기를 자기 딸한테 했더니 딸이 "그런 것(?)을 가만히 놔뒀어? 혼쭐을 내주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혼쭐을 내려다가 미용실이라서 참았다는 얘기를 원장님은 나에게 전해줬다.
'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졸지에 '그런 것'(?)이 돼버렸고, 할머니에게 엄청 혼날 뻔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원장님은 할머니의 과거 이력에 대해 술술 얘기하셨다. 미용실 염색 값이 너무 비싸다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겁을 준 얘기, 미용실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꼭 그 할머니가 누구랑 싸우는 거라는 얘기, 할머니가 싸우면 처음에는 놀랐는데 이제는 '또 싸우나 보다'라고 생각한다는 얘기, 동네에서 알아주는 욕쟁이 할머니라 모두가 피곤해하며 거리를 둔는 얘기. 할머니의 이력을 듣고 나니, 왜 할머니가 나를 오해했는지, 왜 모두가 할머니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프로레슬링만 보는 할머니, '멋있다' 칭찬해드렸는데 왜…
내가 사람들은 만날 때, 내가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사랑이를 키운다고 이야기하고 나면 사람들의 반응은 딱 두 부류로 정리된다. '저 여자 뭔가 문제가 있을 거야! 그러니 혼자 애를 키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 '낳은 애도 버리는 마당에 혼자 애를 키우다니 기특하고 짠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연락을 끊거나 거리를 두면서 이해타산이 맞지 않을 때는 더 이상의 인간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마음으로 더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응원해주고 '진실되고 좋은 사람'이라며 더 많은 기회들을 주곤 했다.
레슬링 할머니를 보면서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수군하겠지. 평범한 할머니는 아니니까. 각자의 생각으로 할머니를 기억하겠지. 그런데 나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동안 긴 시간 살아오면서 억눌렸던 억울함과 원망의 감정들을 프로레슬링을 보면서 풀고 계시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독특한(?) 취미생활을 존중해드렸는데 돌아온 말은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었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할머니 주변에 자기를 욕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나를 본 걸까? 으레 '너도 내가 레슬링 본다고 욕하는 거냐?'라고 말이다.
나도 예전에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왜? 이혼녀라고 만만해 보이냐? 인생 다 실패한 것처럼 한심해 보이냐?'라고 혼자 괜한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에 빠져 지낸 시간들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더 외로워 보이고 짠해 보이는 건 내가 혼자 앞서 나가서 생각하는 걸까? 씁쓸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라는 사람을 모두가 좋아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고방식이 다 다르고,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행동이 다 다르니 말이다. 나 또한 내가 이혼녀라서 나를 더 싫어한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이혼녀라서 나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내가 나를 볼 때 내 삶이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런 내가 썩 좋다.
세상의 기준, 세상의 시간, 세상의 생각에 맞추는 것보다 내 생각, 내 방향으로 천천히 조금씩 딸아이와 함께 손잡고 걸어가다 보면, 한부모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이 길이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고 서로에게 응원이 되겠지!
*칼럼니스트 차은아는 6년 째 혼자 당당하게 딸아이를 키우고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어설픈 아메리카 마인드가 듬뿍 들어간 쿨내 진동하는 싱글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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