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링구얼'을 꿈꾸며 아이와 나누는 대화
'바이링구얼'을 꿈꾸며 아이와 나누는 대화
  • 칼럼니스트 이은
  • 승인 2018.08.29 08: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영부영 육아인류학] 미국 유학생 엄마의 육아 이야기
엄마랑 놀 때는 영어로: 유치원 친구들과 영어로 놀아서인지 엄마랑 놀 때도 놀때만은 영어를 주로 쓴다.
엄마랑 놀 때는 영어로. 유치원 친구들과 영어로 놀아서인지 엄마랑 놀 때도 놀때만은 영어를 주로 쓴다. ⓒ이은

큰아이는 말이 몹시 이른 편이었다(작은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알 길이 없다). 15개월 정도 됐을 때 이미 일상적인 대화가 대부분 가능했다. 나는 쿵짝이 맞게 대화할 수 있는 그 작은 생명체에 전율했으며 아이와 함께 앞뒤가 맞지 않는, 하지만 의식의 흐름을 넘나드는 오묘한 수다를 떠는 것을 즐겼다.

아이의 한국어 실력의 8할은 외할머니의 공이었다. 내 어머니는 내 아이와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가 하는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나는 가끔 귀찮아서 “응응…” 대충 대답하고는 외면해버리는 류의 이야기도 외할머니에게는 전혀 사소하지 않았고, 아이는 아무리 시시콜콜한 것이라도 외할머니와 공유했다. 아이는 말하는 것을 “소통”의 도구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끝말잇기 같은 언어 놀이를 즐겼다.

한국에 머물고 있을 때도 나는 아이와 곧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영어교육 전문가도 아니었고, 학습식으로 아이를 붙들고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능력도, 시간도, 마음도 없었다. 그나마 놀이식에 가깝다는 영어교육 기관에 아이와 함께 다녀보기도 했지만 아이의 실력보다는 엄마의 안도감을 위해서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보다는 평소에 집에서 아이에게 간단한 말은 영어로 이야기해주었고, 그에 대해서 아이가 반응을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냥 혼잣말처럼 지속적으로 영어로 한 번 한국어로 한 번 말을 해주도록 노력했다. 그나마도 게으른 엄마라 하루에 몇 분 정도였다.

아무리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지만 외가 식구들과 함께 한국에서 꽤 오랜 기간을 머물며 영어를 거의 쓰지 않다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했을 때, 아이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눈에 확연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난감해하고 불편해하고 때로는 좌절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아이의 한국어 어휘력이 또래보다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어휘들을 표현해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은 더욱 큰 듯싶었다. 나는 그저 아이에게 두 가지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일인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양쪽 나라를 마음껏 다니고 또 즐기고 많은 사람들을 사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자꾸만 강조했다.

미국에 오고 나서는 더욱 영어 학습교재나 영어교재는 피했다. 그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같이 빌려다 보거나 아이 기분이 괜찮을 때는 엄마와 영어로 대화했다.

다행히 아이에게 영어를 적어넣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유희의 일부가 되었다.
다행히 아이에게 영어를 적어넣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유희의 일부가 되었다 ⓒ이은

◇ 다른 언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기를 소망하면서

시간이 흐르자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영어를 섞어쓰기 시작했다. 엄마와 속 이야기를 할 때에는 여전히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그러다가도 엄마와 장난을 치며 놀이를 할 때는 영어로 이야기했다. 유치원(preschool)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이랑 한 이야기는 스펀지처럼 흡수해왔다. 어느 날은 '엉덩이(butt)' 같은 말을 배워와서 나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아이에게 영어는 공부나 수업 과목이 아니라 그냥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다행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언어를 학습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는 순간 언어에 대한 흥미는 반절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체계적이지 못한 것 같더라도, 나는 그냥 아이가 틀린 문법을 쓰더라도 놔두었다. 그냥 의미를 알아듣겠으면 같이 웃고 대답해주었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그 틀린 문법을 고쳐가기도 했고, 여전히 알지 못하고 고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 프로그램에 참관하면서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고 발표를 하고 자꾸만 무언가를 말하고 시도해보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참 안심이 되었다.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아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완벽하지 않은 표현이나 발음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같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인 것 같다. 아이의 한국어가 외가 식구들의 격려와 끊임없는 관심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면, 아이의 영어는 아이 스스로의 노력뿐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같이 소통하려는 이곳의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한국 사람을 만나도 영어로만 이야기하던 아이가 이제는 방학 중에 한국에 놀러와서는 미국인 친구를 만나도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려는 것을 보니 재미있다.

“한국에 왔으니까 한국어를 써야지.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엄마.” 하는 아이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학년이 올라가고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이 아이에게 한국어는 점점 낯선 언어가 되어가겠지.

한국에 나온 김에 한국어 동화책을 집어들면서 나는 미국에 돌아가면 이번 학기부터는 무조건 아이와는 한국어로만 말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아이가 한국어든 영어든 각기 다른 언어를 통해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만나고 느끼기를 소망하면서.

*칼럼니스트 이은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서 큰 아이를 키웠고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좋은 엄마인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으로 이미 성장해 가는 중이라고 믿는 낙천적인 엄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