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TV를 볼 테니 너는 책을 읽거라
엄마는 TV를 볼 테니 너는 책을 읽거라
  • 칼럼니스트 김경옥
  • 승인 2018.09.2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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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 '공부하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한 방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엄마, 엄마! 나 이제 나가서 놀래."

휴대전화를 켜니 아직 오전 5시 30분이었다. 

"아직은 너무 일러. 봐봐 어둡잖아. 조금 더 자야 돼."

아이는 니킥과 돌려차기, 내리찍기를 동원해 온몸으로 '지금 일어나 놀고 싶다'는 뜻을 어필했다. 그러곤 아이 입에서 나온 그 말.

"아빠는 지금 나가서 텔레비전 보고 있잖아!"

어…? 그 순간 침대 아랫동네의 소란스러운 상황으로 잠에서 얼핏 깨어난 아이 아빠가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남편은 원래 텔레비전 보는 걸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다. 일단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리모컨을 먼저 집어 들고 영화 채널을 튼다. 잠깐이라도 각각의 영화 채널에서 지금 어떤 영화가 방영되는지 확인한 후에야 씻으러 들어갔다. 나는 욕실의 물소리와 텔레비전의 영화 소리가 동시에 들려오는 거실에 앉아 '왜 텔레비전을 켜놓고 씻으러 가는 걸까?' 의아해하기 일쑤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은 1퍼센트의 자의와 99퍼센트의 타의로 텔레비전 보는 횟수와 시간을 급격히 줄였다. 그러나 아이에게 아빠는 여전히 '나 재워놓고 자기는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인 것이다.

아빠가 밤에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은 아니란다… ⓒ김경옥
아빠가 밤에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은 아니란다… ⓒ김경옥

텔레비전의 늪에 한 번 빠지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것 앞에 앉아 있게 된다. 어릴 적 나 역시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털고 일어나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하긴 어렵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그 앞에 앉지 않는다. 앉지 않으니 털고 일어나야 하는 고뇌의 순간도 없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습관이 돼 텔레비전을 켜고 화면을 응시하는 것 자체가 어색해졌다. 그리고 실은 시간이 남아돌아도 무슨 채널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애 엄마 때문에, 하루에 고작 한 시간 남짓 텔레비전을 봐도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돼버리니 아이 아빠가 억울하기도 하겠다.

◇ "아빠는 지금 나가서 텔레비전 보고 있잖아!"

"너는 텔레비전 그만 보고 얼른 들어가 공부해. 숙제 안 했잖아."

다 같이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른들이 한 말씀 하셨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봉숭아학당에서 맹구와 오서방이 특유의 바보스러움을 뽐내는 그 순간에 어떻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겠는가. 봉숭아학당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슬로비디오 마냥 이건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닌 상태로 스멀스멀 내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가다 멈추고 웃기를 반복하면서….

그러곤 힘겹게 책상 앞에 앉는다. 방문 너머에는 드라마 시청이 한창이다. 나의 눈은 책과 노트 사이 어느 지점을 배회하지만 귀와 마음은 문 밖에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유배된 것 같은 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학생 때 과외 선생 노릇을 한 적이 있다. 엄마와의 사이가 몹시 가깝고 애틋해 보이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을 가르쳤는데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마 중간고사 시험 기간 즈음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와서 투덜거렸다.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하는데 엄마가 옆에서 커닝 페이퍼를 만들고 있더란다. 그해 초 아이의 엄마는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갔고 아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간고사를 치러야 했다. 아이 옆에서 같이 공부를 하다 도저히 암기하기가 힘들었는지 '내 나이에 어린 사람들을 따라가기 힘들다'며 은근슬쩍 커닝 페이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옆에서 아들은 "엄마 그러지 좀 마, 그냥 공부해~."를 외쳤을 것이고 엄마는 '내 상황 알잖아~. 그냥 넘어가 주라~." 하는 식으로 눈을 깜짝깜짝했을 것이다. 그날의 장면을 설명하면서 아이는 투덜거렸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애정의 온도를 나는 분명 느꼈다. 엄마를 귀엽게, 안쓰럽게,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아이였다.

실제 엄마가 커닝 페이퍼의 도움을 받아 시험을 봤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른다. 아니었기를 바라지만 어쨌든 그분은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엄마였다. 아이가 고민하는 것을 같이 고민하고 아이가 "공부하기 힘들어"라고 말하기 전에 "공부가 왜 이렇게 어렵냐. 너도 참 힘들겠다."라고 말하는 엄마.

아이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 때 그 앞에 책을 들고 있는 엄마가 있다면 참 좋겠구나 싶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아이에게는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엄마가 아닌, 이미 손에 책이 들려 있는 그런 엄마 말이다. '공부하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한 방 아니겠는가.

*칼럼니스트 김경옥은 아나운서로, ‘육아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일하는 엄마, 육아하는 방송인’이다. 현재는 경인방송에서 ‘뮤직 인사이드 김경옥입니다’를 제작·진행하고 있다. 또한 ‘북라이크 홍보대사’로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책읽기를 지도하는 일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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