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아이의 말… "우리 집에 놀러와"
나를 깨우는 아이의 말… "우리 집에 놀러와"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10.0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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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지나온 삶을 환기해보라는 나지막한 주문
풍선 들고 뛰어가는 연이와 제인이. ⓒ신은률
풍선 들고 뛰어가는 연이와 제인이. ⓒ신은률

연이는 세 명의 재인이를 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명은 재인이, 한 명은 제인이다.

첫 번째 재인이는 연이와 출생 예정일이 똑같았다. 만삭에 다리가 부러져(빗길에 미끄러졌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몸이 가벼워지길 바라며 연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11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이와 예정일이 같았던 아이가 제왕절개로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남편에게 전해 듣고(남편 직장 선배의 딸이다),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거구나’ 하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생일이 같다고 똑같은 인생을 살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사주팔자로 따져도 조금의 비슷한 구석도 없이 완벽히 다른 인생을 살 것 같은 그런 느낌. 연이는 배 속에서 예정일보다 4일을 더 버티고 12월 5일에 태어났다.

배 속에 있던 ‘현덕’이는 연이가 되고, 그 아이는 재인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만만치 않은 육아 전선에 가로막혀 한동안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내었다. 어느 광고 속 문구처럼, ‘엄마라는 경력은 스펙 한 줄 되지 않을’ 것만 같던, 지치고 추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하고 이토록 무거운 일이구나. 연이가 소중해질수록 어쩐지 나를 점점 잃어갔지만 ‘이것이 행복’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힘이 생기던 시절이 그렇게 지나갔다.

◇ 아이가 밥 먹듯이 하는 말 "우리 집에 놀러와"

얼마 전, 다른 직장 동료의 집들이 날, 어느덧 일곱 살이 된 두 아이가 처음으로 만났다. 병원에서 가만히 재인이를 궁금해 하며 지낸 시간처럼(임신했을 때는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너무 많다), 내 눈앞에 있는 재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인이의 긴 앞머리가 내려와 사슴 같은 눈을 가릴 때면 가만가만한 손길로 아이의 이마를 쓸어 찰랑거리는 머리를 귀 뒤에 꽂아주었다. ‘네가 재인이구나, 반가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을 한 장씩 넘기는 기분이었다.

재인이는 말을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아이였다. 처음엔 서먹하던 연이와 재인이는 ‘탐색 기간’이 끝나자 원래 알고 지내던 것처럼 어울렸다. 친해진 계기는 ‘팽이’. 두 공주님은 팽이가 부딪치고 쓰러지고 분해될 때,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배꼽을 잡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소리 내어 웃기 위해 아이들은 세상에 나오는 건지도 모른다. 무작정 웃어보자고, 그러는 편이 인생을 훨씬 잘 사는 거라고 ‘까르르’의 리듬으로 요란하게 일깨워준다. 그 운명에 순응하듯 어른들은 연이와 재인이의 ‘웃음 동맹’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노느라 두 볼이 발그스름해진 연이는 재인이의 귀에 대고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와” 하고 속삭인다. “그으래애” 하고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대답하는 재인이. 비밀스러운 귓속말도 숨기지 못 하는 일곱 살 동갑내기 아이들.

두 번째 재인이 역시 우연찮게도 남편 직장 후배의 딸이다. 연이보다 세 살 어린 동생.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어 걸어 다닐 때마다 실룩거리는 엉덩이가 너무나 귀여운 33개월 아기다.

‘아기 재인’이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 외동이라 아이가 혼자 노는 시간이 많다고 안타까워하는 후배 부부를 남편이 초대한 것이다. 우리는 구면인데, 부부 동반으로 처음 만났을 때는 연이가 세 살, 윤우는 배 속에 있을 때였고 후배 부부는 한창 신혼이었다.

어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거실에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누군가 아기 재인이를 보며 우주에 있던 별이 내려와 여기서 놀고 있다고 말했고, 그 말에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집에 갈 때가 되었을 때 연이는 “우리 집에 또 놀러와!” 하고 인사하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랬다. 아기 재인이는 조그마한 입으로 과연 33개월 아기가 맞나 싶게 “잘 놀다 갑니다~” 하고 화답했다. 특유의 억양이 귀여워서 어른들은 와하하,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 아이의 단순함에서 잊고 살던 따뜻한 삶의 태도를 떠올린다

세 번째 제인이는 ‘동네 제인’이다. 유치원 하원 시각이 비슷해 오며가며 알게 된 여섯 살 동생이다.

은연중에 아이를 닮아가는 듯 엄마가 되면 그 전보다 스스럼이 없어진다. 나와 제인이 엄마는 고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가,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이로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보고 또 봐도 반가운 언니와 동생이 됐다.

놀이터에서 제인이와 실컷 놀고 집에 들어온 날, 저녁을 먹다 말고 연이가 '제인이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달란다. 제인이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 그럼, 연이가 통화해” 하며 용건을 말할 수 있게 전화기를 대어주었다.

"(부끄러운 듯 코맹맹이 소리로) 이모오, 제인이 있어요? 제인아, 하연이 언니야아… 우리 집에 놀러와~."

누군가의 집에 가는 건, 집들이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무언가 실례를 하는 것 같아 주저했던 내 모습이 겹쳐진다. ‘친해지고 싶다’는 순수함보다 ‘예의’를 더 생각하게 되는 나이에 연이가 밥을 먹듯이 자주 하는 “우리 집에 놀러와”라는 초대의 말은 지나온 삶을 환기해보라는 나지막한 주문처럼 들린다.

어릴 적, 엄마가 이제 그만 집에 들어오라고 성화일 때까지 친구 집에 가서 놀았던 기억이 스친다. 낯설기도 하고 낯익기도 한 집의 풍경 속에 내가 들어가고, 혹은 친구가 들어오는 생경한 그 느낌. 어느새 커서 그런 감정을 알게 된 걸까. 아이의 단순함에서 잊고 살던 따뜻한 삶의 태도를 떠올리게 되는 엄마의 삶.

아이들의 체온이 어른보다 높은 건, 0.5도만큼의 온기를 세상에 나누어주기 위해서다. 찬바람 부는 날, 시릴까봐 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여린 고사리 손이 어쩐 일인지 메마른 내 손을 녹여주는 것처럼, 쿨하고 시크한 걸 미덕으로 삼게 되는 어른들이 실은 아이의 따뜻함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연이 덕분에 동심원이 퍼지듯, 생활의 범위가 잔잔하게 넓어지고 있다. 이 작은 요정에게서 함민복 시인이 말한, ‘말랑말랑한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쌓여간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그렇게 어우러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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