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마감에 정신이 없던 어느 주말. 작업 책상 너머로 여덟 살 둘째가 책 읽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서 남편이 구○수학 학습지를 푸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뭐야. 이 상황은.
나 : "왜 학습지를 자기가 풀어?"
딸 : "아빠가 하는 거 아냐. 내가 하는 거야."
나 : "뭐? 지금 아빠가 쓰고 있잖아."
아빠 : "애 말이 맞아. 나는 그냥 쟤가 불러주는 대로 쓰는 거야."
딸 : "맞아, 그러니까 내가 푸는 거지."
나 : "뭐라고?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빠 : "7 더하기 8은?"
딸 : "15."
아빠 : "10 더하기 2는?
딸 : "12."
아빠 : "너 손가락 세서 하는 거 아니지?"
딸 : "아니야."
뭐가 좋은지 깔깔깔 웃는 남편과 둘째. '아니 하기 싫다고 해도 하게 해야지, 대신 써주는 건 뭐야?'라는 말을 꾹 눌러 담았다. 이 훈훈한 분위기에 이상한 건 나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한 거라는 둘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림책 보면서 암산하는 것도 재주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편 : "나, 큰애 때도 이렇게 했는데?"
나 : "응?"
남편 : "큰애 1학년 때도 덧셈 뺄셈 할 때 하기 싫다고 하면 말로 하라고 하고 내가 써줬어. 애들이 10분 이상 집중하기가 뭐 쉽나. 이렇게 하면 짜증도 안 내고 오히려 금방 해."
남편이 달리 보였다. 지난 열두 살 큰아이와의 한라산 종주 때 "힘들면 내려갈까?"라고 묻지 않았다던 남편에게 또 한 수 배웠다. 억지로 하는 건 시키는 부모나 해야 하는 아이들이나 모두에게 참 딱한 일이다. 서로 괜히 기분만 상한다.
남편은 나름대로 꾀를 낸 아이가 "써달라"라고 하는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 같았으면 "그게 내 숙제냐? 얼른 안 해?"라고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남편은 아이들보다,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래, 아빠가 써줄게. 5 더하기 2는?"
공부는 제가 하는 건데도 아빠가 '써준다'는 이유로 신이 난 둘째는 그림책을 보면서 암산으로 정답을 척척 말한다. 나랑 학습지 공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얼마 전 친구와 사교육 이야기를 하다, 별다른 학원에 다니지 않는 열두 살 큰아이가 연산 학습지만 5년을 넘게 한 번도 끊지 않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친구가 물었다. "학습지 밀리지 않고 해?" 물론 아니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검사하기 전에 어떻게든 끝내긴 하더라고." 친구는 "아직 어린애가 그게 어디냐?"면서 대견하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둘째와 함께 공부하는 남편을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내 교육 철학만 강요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꾸준히 계속 오래 할 수 있었을까. 연산이 귀찮고 어렵고 하기 싫을 때, 아이들의 잔꾀를 받아주는 아빠가 없었다면, 혼자 하기에는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주는 아빠가 없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 : "윤아, 많이 했으니까 조금 쉬었다 할까?"
아이들과 소파와 한몸이 되어 텔레비전만 볼 때는 그럽게 밉더니…. 남편의 다른 모습을 봤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2017년 5월 1일)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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