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학기 강의라고 했다. 그래서 무려 4개월 전에 이야기된 강의였다. 그것도 내 책으로! 책 낸 지 1년... 부끄럽지만 독자와 무려 처음 만나는 자리다. 몇몇 저자는, 네임드(유명세)와 상관없이 책을 내고 꾸준히 독자들을 만났다. 나는 안 그랬다. 출판사나 남이 차려주는 밥상도 없었지만(엉엉),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가 그 밥상을 차릴 용기도 배포도 없었다. '나도 독자들을 만나고 싶은데...' 그저 마음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밖으로 내뱉지 않는 말은 아무도 모른다. 진짜 아무도 몰라줬다. 누굴 원망할 자격도 없다. 처음부터 책을 낸 출판사에 강의는 못한다고, 그거 빼고는 다 하겠다고 말한 나였다. 책을 내보니까 알겠더라. 말의 힘을.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책도 팔 수 없다는 걸. 아무리 애써 만들어도 재고로 쌓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 맞다. 무명의 저자들은 대부분 다 그렇다. 너무 잘 알지만 나는 피해 가고 싶었다. 나는 빠지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책을 알리고, 팔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말 대신 글을 쓰면서 독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다. 내가 하는 말을, 내 생각만큼 귀담아 들어줄 리 만무하다. 위안이라면 베스트셀러는 아니어도 스테디셀러 정도는 되는 것 같다는, 출판사 편집자님의 말이다. 충분한 위로가 됐다. 그래서 계속 내 이름으로 글을 썼다. 그림책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에 대해. 그렇게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었다.
그랬으니 지난 6월 “작가님 책 이야기를 하시면 된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으로 뛴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드디어 나도 독자를 만나는구나. 기회를 준 그분들께 감사했다. 그 사이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세 번 바뀔 즈음인 8월 말에 문자가 하나 왔다. ‘접수 인원이 적으면 폐강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강의가 폐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난 9월 말 이번에는 "죄송하다"는 문자가 왔다. 이런저런 인사치레를 빼면 내용은 한 줄로 요약 가능했다.
‘접수인원이 3명이라, 아무래도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배경음악이라도 깔아야 할 판이다. 좌절과 비탄이 가득 담긴. 근데 그 짧은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청자가 3명이면, 적어도 5명은 온다는 건데... 그분들이 시간을 내서 오신다는데, 내가 가서 무슨 이야기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왜 이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강의를 하는 곳은 천안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 강의를 위해 하루 휴가를 내야 하고, 강의안도 준비해야 하고, 거리도 1시간 반이 넘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려는 분들이 오신다는데.
생각도 잠시, 결정 장애에 빠졌다(내가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도움이 필요했다. 잘 나가는 작가이자, 글보다 강의가 적성에 맞는 것 같은, 100명 앞에서도 강의를 척척 해낸 <소년의 레시피>의 저자 군산 언니, 배지영 작가에게 연락했다. 역시, 배 작가는 내 생각에 힘을 실어줬다.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 더는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문화센터 담당자에게 즉시 문자를 보냈다.
‘접수 인원 3명이면 5명 정도는 오실 것 같은데 제가 한번 가서 강의를 하면 폐가 안 될까요? 취소 공지 하기도 번거로우실 테고... 그렇게 오시는 독자분들 꼭 만나고 싶은데...’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다.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을테니, 사실 취소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하늘이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보다.
“강사님만 괜찮으시면 저희도 괜찮아요. 더 홍보해서 인원 모집 더 하겠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 인생 첫 ‘독자와의 만남’을 예정대로 하게 됐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 거. 강의를 하기로 한 그날이 애들 학교 운동회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오 마이 갓. 둘째 입학 후 처음 하는 운동회인데... 게다가 남편은 그즈음 출장을 가게 될 수도 있다고 알려왔다. 사방이 지뢰밭이었다. 다행히 남편 출장은 20일로 정해졌지만, 운동회는 아니었다. 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헉, 엄마 강의 날이랑 같네. 어쩌지? 못 가겠네...”
나는 못 가도 아빠는 갈 수 있다는 말에, 아이들은 크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5학년 큰아이는 엄마가 강의를 또 한다는 사실에 놀라며, 기뻐해주기까지 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연재 '엄마가 한번 해봤어'의 영향이 컸다. 아이는 자신과 비슷한 엄마가 강의를 준비하고 실제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성큼 자랐다. 발표를 할 때면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아이였다. 발표하는 날이면 울면서 학교에 갔던 아이였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언젠가는 학교에서 5번이나 뽑혀서 계속 발표했다는 말도 할 만큼 좋아졌다. 기록의 힘이다.
이제 정말 남은 건 그날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이다. 블로그나 카페, 온라인 서점 등에 올라온 책에 대한 독자 반응을 살펴보면서 강의안을 짜 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너무 즐겁다. '내가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없는 재주를 한탄할 만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너무너무너무 많아졌다. 그때 마침 읽은 운명적인 책이 있었으니 바로 박웅현의 「여덟 단어」다. 달변인 줄 알았던 그도 나 같은 때가 있었다니 깜짝 놀랐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하고 제 자신을 돌아봤더니, 너무 잘 하려고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죠. 하지만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할 말을 하는 것'이었어요." - 59p.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때 가장 필요한 건, 마인드 컨트롤이다. 그거면 된다. '잘 하지 못해도 괜찮다,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에서 배운다, 떨어도 괜찮다, 떨려도 괜찮다'... 이런 마음으로 내 글을, 독자들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보니 말하고 싶은,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할 주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할 말이 생겼다.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다. ‘엄마들에게 꼭 필요한 그림책 육아’ 그 이야길 들려줄 참이다. 10월 19일,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2017년 5월 1일)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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