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가도 되냐”라고 물어보는 남편, 고마웠다
“출장 가도 되냐”라고 물어보는 남편, 고마웠다
  • 칼럼니스트 최은경
  • 승인 2018.10.19 1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마가 한번 해봤어] 맞벌이로 산다는 것

드라마 속 아빠들의 출장은 그렇게 폼이 나 보일 수가 없었다. 007 가방을 들고 공항에 가는 장면, 혹은 공항을 나오는 장면. 그 뒤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장면. 멋졌다. 그 멋짐 뒤에 혼자 집안 대소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여자들이 있다는 걸 어린 시절의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그 여자들이 보였다. 드라마 속이 아니고 실제에서. 남편의 출장은 반드시,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이었고(반대로 여자들의 출장은 자체적으로 포기하거나 윗선의 배려로(?)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아내 혹은 육아는 그들이 출장을 떠나는 과정에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니었다.

ⓒPixabay
드라마 속 아빠들의 출장은 그렇게 폼이 나 보일 수가 없었다 ⓒPixabay

남편이 내게 “출장을 가도 되냐?”라고 물어본 건 2년 전쯤부터였다. 맞벌이 우리 부부는 직장이 먼 내가 새벽 6시 반에 출근하면, 남편이 7시 반쯤 일어나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출근한다. 남편 직장이 유연근무를 할 수 있고, 집에서 가까워서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에 남편 회사가 집에서 30여 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일찍 출근하고, 남편이 애들 등교를 책임진다. 아이들은 하교하면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챙겨 먹고 집으로 온다.

그러니 남편이 출장을 가고 없으면 당장 내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물론 내가 많이 힘들긴 하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좀 늦게 출근해서 늦게 나오면 된다.

그런데도 남편은 마음이 편치 않았나 보다. 지난 2년여간 “나 출장 가도 되겠어?”라고 몇 번을 물으면서도 “(회사에) 못 가겠다고 했어”, “애들 때문에 안 되겠다고 했어”라고 말했다.

◇ 남편이 내 일을 그 정도까지 배려하고 있는 줄 몰랐다

그런 남편을 보며 “왜 출장을 마다하지?”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나라면 당장 가겠다고 했을 텐데(출장을 가면 '내가 왜 여길 왔지?'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자유만 생각하는 나와 남편은 생각이 달랐다.

“내가 출장 가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침에 애들 등교시키는 거로만 끝나지 않을 텐데? 애들 숙제도 챙겨야 하고 저녁에 데려오는 것도 해야 하잖아. 그리고 당신 최근에 부서장 맡았는데, 회의도 많아서 집에서 재택근무 하기도 어려울 거고. 또 부서원 수도 적고 일이 많아서 이래저래 늦을 일이 많을 텐데, 내가 장기간 출장을 가면 힘들지 않겠어?”

남편이 내 일을, 사회생활을 그 정도까지 배려하고 있는 줄 몰랐다. “그래도 출장 가야 한다고 하면 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은 하면서도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말을 듣고 남편이 출장을 가버렸다면 진짜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내내 나 때문에 남편이 출장을 못 갔다는 사실이 걸렸다. 회사에서 밉보이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됐다.

그런데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우리 회사 조직개편으로 10개월간의 내 부서장 체험이 끝났다. 상황이 달라졌다. 하루 두 번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 부담, 매일 출근해서 일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졌다. 그즈음, 남편이 물었다.

“이번에는 나 출장 가도 될까?”

“응? 가도 되지. 언젠데? 어디로 가?”

“스웨덴. 근데 좀 길어….”

“얼마나?”

“한 3주.”

“헉, 3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3주를 “나 죽었어” 하고 살아야 하는 게 문제지만. 남편이 출장에서 다녀오면 나만의 자유시간으로 보상받을 계획을 세우면서 어떻게든 버텨보리라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간다고 해. 매번 못 간다고 해서 나도 좀 그랬어.”

“응… 생각해보자.”

“그래 고마워”도 아니고 "생각해보자"라니,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싶은 서운한 마음도 살짝 든다. 며칠 후 남편이 말했다.

“이번엔 출장 못 간다고 하기가 좀 그래서 간다고 했어. 우리 팀 다 가는 거라…. 근데 3주는 너무 길고, 2주만 간다고 했어. 그럼 자기도 좀 낫겠지?”

◇ 내가 느낀 '자기 확장'의 즐거움을 남편도 알게 해주고 싶다

조금 안도했다. 남편의 배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즈음 나는 읽지 않은 책인데, 기사에 나온 한 대목이 인상 깊어 기억해둔 게 생각났다. 「메모 습관의 힘」(신정철, 토네이도, 2015년)에서 저자가 말한 '오래가는 관계의 비밀'에 대한 내용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 성장을 추구하고 있고, 당신의 배우자에 의해 그것을 이룬다면 이 과정에서 당신의 배우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우자의 자기 확장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본인 자신에게도 매우 즐거운 일이 됩니다."

이 기자가 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하고 자신을 확장하며 성장하고 싶은 근원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또 '사람들은 배우자를 통해 자기 확장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관계에 더 헌신적이고 만족한다'는 거다.

남편과 나의 관계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그려졌다. 실제 나도 그랬다. 내가 나의 성장을 도모하는 모든 일에 남편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근 후, 주말에 틈틈이 글을 써야 하는데 남편의 도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첫 책을 출간할 때도 그랬다.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덴스토리, 2017년)에 아빠 그림책 섹션이 따로 있는 것도 그런 고마운 마음에서였다.

남편은 확실히 다른 남편들과는 달랐다. 다른 남편들과 똑같이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육아에 주도적이고, 가사의 반 이상을 담당하며 내가 하는 일을 언제나 존중해줬다. 내가 남편에게 "회사에서의 고과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집 고과는 매년 최고야"라고 말하는 이유다.

문서도 죄다 영어. 회사 내에서도 영어만 쓴단다. 남편의 고충을 내가 몇 %나 알 수 있을까.
문서도 죄다 영어. 회사 내에서도 영어만 쓴단다. 남편의 고충을 내가 몇 %나 알 수 있을까. ⓒ최은경

그래도 회사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다. 특히나 남편은 영어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이 집에 들어오면 나와 아이들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을 환대를 받으니 좋은 거 아니냐고, 그러니 자신 없어하지 말라고, 연봉이나 진급에 연연하지 말라'고 격려해줬다. 물론 남편이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다.

그러니 내가 더 분발해야겠다. 내가 느낀 '자기 확장'이란 경험의 즐거움을 남편도 알게 해주고 싶으니까. 남편이 출장 가고 2주,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는 다시 이 연재에 담을 예정이다. 살아는 있겠지?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2017년 5월 1일)를 펴냈습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