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연말, 딸에게 줄 엄마의 선물
다가오는 연말, 딸에게 줄 엄마의 선물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10.1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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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달력 예찬

연말 가족여행 계획을 세우려고 연남동에 있는 작은 책방에 들렀다. 이곳에선 여행 서적들이 당당히 주인공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책들은 물론, 어느 독립출판사에서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의 유럽여행기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책들도 모여 있다. 

작은 공간은 특유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대형 서점에 가면 늘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유명 소설가의 작품은 이곳에 없는데, 그 소설가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여행 에세이는 눈에 띈다. ‘이런 것도 있네?’ 눈을 두는 곳마다 호기심이 어린다.

가을을 부르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부러 찾은 책방에는 비가 와서인지 손님이 없다. 주인은 내가 편하게 책을 고를 수 있도록 책방 안쪽 조그만 사무실로 들어갔다. 재즈 풍의 음악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곳의 편안함이 곁에 남았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홀로 서서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들을 살핀다. 리스본, 교토, 치앙마이, 몰타…. 어딘가에서도 내가 사는 이곳을 풍문으로 듣고 있겠지. 편지지를 펼쳐두고 오도카니 앉은 것처럼 이름만 들어본 먼 곳의 날씨가 궁금해진다.

◇ 비켜서는 연습 중인 측은한 내일들

“달력, 드릴까요?” 한참 동안 고른 책을 싸주며 책방 주인이 묻는다. 벌써 달력이 나올 때인가, 미묘하게 커진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니 글쎄 ‘2018년산’ 달력이다. 카운터 구석자리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달력들이 초조한 듯 서로를 의지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자신의 처지를 알아채는 데는 기다림만 한 게 없지. 연초에 붙었을 가격표가 어쩐지 남세스럽다. “네, 주세요.” 비켜서는 연습 중인 측은한 내일들이 이국의 풍경을 담은 책과 함께 종이봉투에 담긴다. 남은 두어 달의 내일도 순서대로 오늘이 될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한 살씩 더 먹고선 때때로 크는 게 아쉬울 만큼 짱짱해질 테지. 밀린 빨랫감으로 일주일의 인사를 대신하는 남편도 아빠 노릇할 시간이 생기겠지. 태초부터 내일은 없다던 윤동주의 노래처럼 남은 날들아, 어서 오늘이 되고 어제가 되자. ‘연말 달력’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 아이들의 취향을 확인하며 미소 짓는 저녁

집에 와서 보니 책방 달력에는 12개의 나라와 도시가 일러스트로 담겨 있다. “얘들아 이것 봐봐.” 일본은 벚꽃으로 유명해, 제주는 감귤로 유명해, 하바나는 자동차가 멋진 곳인가봐! 달력을 넘기며 ‘유명해’를 반복하고 있으니 풍문으로 들은 얘기를 호들갑스럽게 전하는 빨래터 아낙이 된 것 같다.

“연이는 어디가 마음에 드니?” 하고 물으니 오로라가 있는 아이슬란드가 좋다고 한다. 소시지 좋아하는 윤우는 “누리(우리), 전머니(Germany) 가서 소시지 머그자!” 한다. 오대양 육대주, 꿈같은 세계를 손에 들고 있는데 무엇이 이유인들 어떠랴. 아이들의 취향을 확인하며 미소 짓는 저녁이 풍요롭다.

연이가 가보고 싶은 나라 영예의 1위, 아이슬란드. 이유는 오로라가 예뻐보여서다.  연이가 알록달록 색칠을 했다. ⓒ신은률
연이가 가보고 싶은 나라 영예의 1위, 아이슬란드. 이유는 오로라가 예뻐보여서다. 연이가 알록달록 색칠을 했다. ⓒ신은률

◇ 달력 예찬

책방 주인이 권해서, 남아 있는 모양이 애처로워(?) 보여서 달력을 받기는 했지만 실은 비밀처럼 탁상 달력을 좋아한다. 12장(혹은 13장)의 그림에서, 만든 사람의 의도와 취향을 읽는 재미. 한 장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30일만큼의 무게감과 책임감을 가늠해보는 것도 좋다. 

새해 달력을 넘기다 보면 햇볕에 잘 말린 이불을 덮는 것처럼 산뜻한 기분이 든다. 해마다 남편이 가져오는 연예소속사 달력에는 그해 눈에 띄는 활동을 했던 묵직한 배우들과 함께, 앞으로가 기대되는 신예들의 얼굴도 볼 수 있다. 새해에 설레지 않으면 실례라는 듯 표정에서 묻어나는 ‘청춘’은 보는 사람에게도 푸르른 봄의 기억을 가져다준다.

해묵은 달력은, 고전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날짜가 지나도, 해가 바뀌어도 그 달의 정수(精髓)는 변함이 없는 까닭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공존, 해가 지난 달력이 큐레이션된 작품 같다면 오버스러울까.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로 만들어진 달력은 나에게 감가상각이 전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소장품이다. 

최근 몇 년, 불황이라 달력 만드는 곳이 줄었다는 얘기를 듣고 내심 안타까웠다. 면면의 색깔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생일 케이크 없는 생일처럼 서운함이 밀려왔다. 기대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날들이 무슨 의미일까. 부디 많은 곳에서 지금쯤 내년을 위한 달력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기를.

◇ '먼 북소리'처럼 오늘이 될 내일을 응원한다

올해 유치원을 졸업하는 연이를 위해 지난 3년간의 유치원 사진을 모아 달력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유치원 졸업을 축하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기념하는 엄마의 선물. 긴 학교 생활도 유치원 생활처럼 잘해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달력을 만들어보기로 한다. 

시간은 마법 같아서 어떤 건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만 어떤 건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귀한 것으로도 만든다. 당장은 엄마 취향, 엄마 만족이 크겠지만 연이가 스스로 ‘참 어렸구나’ 느낄 쯤이면 엄마의 달력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번에는 절대, ‘해야지 해야지 병’에 지지 않으리라.

여행 책방에서 받아온 ‘연말 달력’을 날짜에 맞게 펼쳐두며 성실한 여행객처럼 지나갈 내일들을 생각한다. 몇 장 남지 않은 페이지가 넘어가면 아무리 아쉬움에 손사래 쳐도 2019년이 해사하게 올 것이다. 각자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 앞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기를, 하루라도 더 어린 아이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기를. 육아에 지친 심신 보듬으며 먼 곳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오늘이 될 내일을 응원한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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