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태그로 보는 육아맘] 엄마의 건망증
[해시태그로 보는 육아맘] 엄마의 건망증
  • 칼럼니스트 여상미
  • 승인 2018.11.14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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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육아맘 #건망증 #습관 #메모 #기억 #추억

요즘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자주 멍해지곤 한다. 가을을 탄다든가 하는 감상적인 이야기는 육아맘에게 사치일 뿐, 실제 원인은 전혀 다른 것에 있다. 도무지 하고자 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요할 때 바로 꺼내 쓰려고 눈에 훤히 보이는 곳에 놓아둔 아이 물건을 코앞에 두고도 온 집 안을 들쑤시지 않나, 빨래를 개다 말고 문득 생각난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면 내가 이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또 사라진다. 그래서 또 엉뚱한 일을 하다가 문득 미처 정리하지 못한 빨래 더미를 발견하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 것이다.

마치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기억을 삭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손에 메모지와 펜을 쥐고 지낸다. 메모를 해두면 그나마 일의 순서를 정하는 데도 효율적이고 꼭 잊어버리면 안 되는 일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메모가 습관이 되어 그런지 이제는 할 일을 적어둔 메모지가 없으면 불안할 정도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이를 낳기 전에도 그리 꼼꼼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허술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이를 낳고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특히 기억과 관련된 부분에서 말이다.

신이 엄마에게는 일부러 건망증을 선물한다고 한다. 그래서 100으로 가정한 육아 노동 중 90이 힘들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10만을 기억해 살아가게 한다고. 출산의 고통도 어떻게 이처럼 금방 까마득히 잊힐 수 있는지, 누군가는 그렇게 잊을 수 있어서 또 둘째를 낳는다고 하더라.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깜빡깜빡 잊을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오로지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말이다.

하지만 이따금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건망증이 심했는지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나이를 이야기하며 세월을 한탄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그 나이가 내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너무 많아서, 인정하기 싫어서 놀란 것이 아니라 진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내가 나이 먹는 것도 몰랐다는 어른들 말은 그냥 그만큼 바쁘고 정신없이 세월이 흘러갔다는 소리겠지 했었는데, 나는 정말 내 나이를 잠시 잊었다. 잊고 살았었다. 아이의 개월 수는 물론 지금도 누가 묻는다면 생후 며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정작 내 나이는 몰랐다니! 나는 엄마로서 살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 살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어느새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하고자 해서 되는 게 아니었구나. 아이를 낳은 순간, 아니 이후 아이를 기르는 모든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사람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뇌 구조까지 지배할 정도로 강력하게!

아이밖에 몰라 생긴 엄마의 건망증. 다른 건 잠시 내려놔도 괜찮겠지요?
아이밖에 몰라 생긴 엄마의 건망증. 다른 건 잠시 내려놔도 괜찮겠지요? ⓒ여상미

지금도 간혹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언제 이렇게 컸지?’ 특정한 느낌과 순간들은 기억이 나지만 사진을 보고, 다시 또 보아도 내가 이 조그만 생명을 언제 이렇게 꼬마 사람으로 키웠는지 모르겠다.

오가다 문득 마주치는 신생아들을 보면 내 손가락 하나를 겨우 움켜쥐던 조그만 손가락이 그립기도 하고, 내 품 안에서 뻐끔거리던 참새 같은 입술이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세세한 일상들은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하여 그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 아이를 또 갖기 원하는 엄마들도 많더라. 설령 나라는 존재를 다 잊고 또 잊는다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그 순간들! 그것 하나면 다른 것들은 좀 잊고 살면 어떠랴. 오직 너를 만나 행복했던 추억들만 가지고 엄마는 오늘도 정신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칼럼니스트 여상미는 이화여자대학교 언론홍보학 석사를 수료했고 아이의 엄마가 되기 전까지 언론기관과 기업 등에서 주로 시사·교양 부문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아이와 함께 세상에 다시 태어난 심정으로 육아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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