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아빠의 완벽한 휴일(feat. 두 딸)
피곤한 아빠의 완벽한 휴일(feat. 두 딸)
  • 칼럼니스트 윤기혁
  • 승인 2019.01.10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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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남편의 알쏭달쏭 육아수다]
ⓒ베이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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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작심삼일을 세 번이나 하고 나니,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도 가물거린다. 지난 연말엔 업무에, 회식까지 더해져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었다. 물론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에는 출근하지 않았지만, 쌓인 피로를 핑계로 따뜻한 이불 속에 머물렀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모두 방학인지라, 평일도 집에 머무는 두 딸은 게으른 아빠 때문에 주말도 평일처럼 지냈다.

새해 첫 번째 토요일. 두 딸이 서로 손을 붙잡고, 이불 속을 헤매고 있는 아빠를 향해 다가왔다. 미처 외출 계획을 세우지 못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당당히 내 앞에 선 두 녀석. 다정함과 단호함의 경계에 선 목소리로 첫째가 말했다.

“아빠. 제안이 있어. 오늘 같이 놀아줘. 대신 내일은 푹 쉬고. 자도 되고, 책을 읽어도 돼. 같이 놀자고 안 할 테니, 오늘만 딱! 어때?”

요즘 들어 ‘아빠도 좀 쉬고’라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참다못한 아이들이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아빠를 그냥 내버려 두는 대신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라도 확실하게 놀아야겠다는 다짐을 한 모양이다.

집에만 들어서면 무거워지는 몸뚱이를 이끌고 미안함에 빠져 있던 내가 '오늘만 놀면 내일 쉰다'는 이 달콤한 제안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러기로 했다. 아이들은 나에게 다짐을 받았고, 나 또한 아이들에게 다짐을 받았다.

우선, 아이들이 원하는 선생님 놀이를 시작했다. 1교시는 첫째 딸이 선생님이 되고 둘째와 나는 학생이 되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가’로 시작하는 단어 두 개를 노트에 쓰고 검사받으라고 했다. 이제 겨우 그림과 글을 구분하는 둘째에게 단어 쓰기는 시기상조다. 하지만 우린 학생이지 않은가. 속닥속닥. 쑥덕쑥덕. 그렇게 귀엣말을 해가며 둘째와 나는 ‘가방’과 ‘가수’를 비슷하게 그려냈다.

다음은 2교시. 이젠 아빠가 선생님이라고 두 아이가 말했다. 나는 무얼 할까 고민하다 옷장 구석에 놓인 헌 옷과 털모자를 보고는 둘을 묶어 공으로 만들었다. “자, 학생들. 이제 선생님과 2 대 1로 피구를 할 거예요.” 좁은 방에서 이뤄지는 3인용 피구인지라 우리만의 규칙을 정하고 공을 던졌다. 움직임이 스펙타클하진 못해도 맞히고 피하는 순간의 '쫀득함'은 흠뻑 느꼈다.

둘째가 선생님이 되는 3교시. 무얼 할까 궁금했는데, 미술 시간이란다. 얼마 전 산타할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종이 인형 책 중 한 장씩 찢어주고는 인형 모양대로 자르라는 것이다. 헉. 홀로 앉아 끙끙거리며 가위질을 하더니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부분에서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를 언니와 아빠에게 지능적으로 부탁하는 녀석이 놀랍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허리를 잔뜩 숙인 채 종이 자르기를 하고 나니 낮 12시. 이렇게 하다가는 4교시 중간에 나는 쓰러져 응급실로 갈 것 같았다. 점심 식사도 할 겸 야외 수업을 제안했다. 고소한 멸치국수가 먹고 싶다는 첫째, 달콤한 아이스크림 와플이 당긴다는 둘째. 두 따님의 뜻을 받들어 식사하고 후식을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고 4, 5교시를 지나 6교시가 끝났다. 아빠에게는 짧고, 아이들에겐 긴 휴식이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다시 시작된 야간학습은 9교시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스르르 감기는 눈을 한 나는 고개를 치켜들어 시계를 본다. 밤 10시. 그럼에도 아이들은 맑은 별빛 같은 두 눈을 서로에게 반짝인다. 어떤 신호였는지, 키득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썼고 은밀한 목소리가 얇게 새어 나왔다.

“오늘은 엄마가 쉬었으니까, 내일은 엄마랑 놀자. 하하하하하하하.”

홀로 거실에 앉은 아내에게 조용히 아이들의 계획을 전했고, 나는 미소 지었다. 어쨌든 나는 내일이면 두 딸의 멋진 제안 덕에 완벽한 휴일을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 날 두 딸은 내게 같이 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겐 육아 외에도 그동안 미루었던 가사가 있었다.

*칼럼니스트 윤기혁은 딸이 둘 있는 평범한 아빠입니다. 완벽한 육아를 꿈꾸지만 매번 실패하는 아빠이기도 하지요. 육아하는 남성, 아빠, 남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은밀한 속마음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저서로는 「육아의 온도(somo, 2014)」 「육아살롱 in 영화, 부모3.0(공저)(Sb, 2017)」이 있으며, (사)함께하는아버지들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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