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우리 그 총 가지고 놀지 말자!
아들, 우리 그 총 가지고 놀지 말자!
  • 칼럼니스트 김경옥
  • 승인 2019.01.11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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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 「몽실 언니」와 장난감 총

"손 들어. 안 그러면 쏜다!"

아이가 장난감 총을 들고 호기롭게 외쳤다.

어떻게 총이 장난감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이 장난감이 될 수 있을까 ⓒ김경옥

아이의 외침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고 '살려 주세요'를 내뱉다가 문득 이 상황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정신과 의사가 한 환자가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본 탓일까. 얼마 전 학생이 휘갈겨 쏜 총에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해외 뉴스를 본 탓일까. 아니면 「몽실 언니」라는 책을 읽고 있는 탓일까. 어떻게 총이 장난감이 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무기인 총과 칼이 어떻게 장난감으로 둔갑해 아이들의 손에 들려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는 부쩍 못된 놈들을 응징하는, 그 과정에서 총과 칼이 필수인 만화에 빠져 있다. 장난감을 들고 역할 놀이를 할 때에도 다정한 '안녕!'으로 시작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얍!" 우렁찬 기합과 함께 비밀 무기들을 발사하고 휘두르다가 누군가를 기어이 쓰러뜨리는 것으로 끝을 낸다.

며칠 전부터 권정생 작가의 소설 「몽실 언니」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일어난 전쟁의 공포가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온 나라를 뒤덮는다. 총과 칼이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간신히 든 잠을 깨운다. 폐허가 된 마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혼자 남겨졌다.

그렇게 몽실이도 혼자가 됐다. 총 소리에 겁을 먹고 낯선 누군가의 목소리에 놀라던 동네 아이들은 그것이 몇 날 며칠, 몇 달 이어지니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버렸다. 몽실이 곁을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간다.

아이들은 이젠 별로 겁을 내지 않았다. 기차 정거장이 있는 마을에 폭격을 퍼부었다. 학교가 타고 정미소가 불에 탔다. 전쟁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재미있게 구경을 하고 흉내를 냈다. 총 쏘는 시늉, 쓰러져 죽는 시늉, 칼로 찌르고 자빠뜨리고, 몽둥이로 패고 함성을 질렀다. (중략)

박 씨 아저씨가 지서에 끌려갔다. 하루아침에 딴 세상이 된 마을에 더 큰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홰나무집 김 씨 아저씨도, 삿갓집 윤 씨 아저씨도 끌려갔다. 며칠 뒤 아이들은 모두 이상한 흉내를 내고 있었다. "땅 콩!"하고는 목을 쑥 빼면서 혀를 내밀고 죽는 시늉을 했다. 잡혀 간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몽실 언니」 중에서)

하루아침에 전장으로 끌려간 아버지와 전쟁 통에 아이를 낳다 죽은 새어머니,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고모네 식구. 세상에 혼자 남겨진 몽실이가 속없이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초등학생 시절. 고무줄놀이가 유행이었다. 우리는 온갖 동요를 부르며 고무줄 위를 뛰고 넘으며 놀았다. 그때 가장 인기 있었던 노래가 지금도 기억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

지금 가만히 가사를 곱씹어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그 노래가 이런 내용이었다니. 전우의 시체를 넘어 전진해 피맺힌 적군을 물리치자고,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그리 외쳐댔다니. 왜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인민군이 남으로 내려오던 그때 학생 의용군 하나가 몽실이 집으로 들어온다. 새까맣게 탄 얼굴, 움푹 들어간 눈자위, 기다란 모가지가 가엽게도 지쳐있던 아이였다. 누더기처럼 해진 커다란 군복을 입은 열대여섯 되어 보이는 아이는 몽실이 집으로 들어왔다.

"넌 누구야?"

"의용군이야."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싸움터로 가는 거야."

"너도 싸울 줄 아니?"

"그럼, 인민을 위해 싸우는 거야."

"사람을 죽일 줄도 아니?"

"왜 그런 걸 묻니?"

"사람을 죽이는 건 인민을 위한 게 아니야."

"인민을 못살게 하는 반동분자는 죽여야 해!"

"사람을 죽이는 인민군도 같은 반동이야!"

"뭐야?"

의용군 아이가 어깨에 멘 총을 벗었다. 그러곤 돌아서서 총구멍을 겨누었다.

"왜? 나 같은 아이도 죽일 줄 아니?"

"그래, 죽일 줄 안다."

"죽여봐! 어서 죽여 봐!"

"…."

의용군 아이와 몽실의 눈이 마주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둘은 그렇게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의용군 아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이…."

의용군 아이는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몽실의 눈에도 물기가 가득 괴어들었다. 몽실은 울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물었다. "네 이름이 뭐니?" "이순철이야." 그러고는 총을 움켜잡고 달아나듯 사립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몽실은 뒤따라 쫓아갔다. "순철아아…." 몽실의 여윈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몽실 언니」 중에서)

전쟁 연구가들은 20세기, 100년 동안 여러 크고 작은 전쟁으로 1억에서 1억 8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다. 지구 저 편에서는 지금도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아이들은 묻는다.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이 싸움은 언제 끝이 나는지 말이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총을 겨눴다가 눈물이 먼저 떨어지는 순철이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누가 순철이에게 총을 쥐여준 것일까. 왜 순철이는 울면서 총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장난감 총을 들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이 저 총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들, 이제 우리 그 총 그만 가지고 놀자."

*칼럼니스트 김경옥은 아나운서로, ‘육아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일하는 엄마, 육아하는 방송인’이다. 현재는 경인방송에서 ‘뮤직 인사이드 김경옥입니다’를 제작·진행하고 있다. 또한 ‘북라이크 홍보대사’로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책읽기를 지도하는 일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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