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 탈출! 엄마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까막눈 탈출! 엄마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 칼럼니스트 한희숙
  • 승인 2019.01.18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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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한 장 육아일기 한 줄] 아이를 가르치며 엄마도 배운다

올해 일곱 살이 된 우리 아이는 아직 한글을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가르치면 된다는, 요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안일함으로 지금껏 아이 한글 교육을 미뤄왔다. 일곱 살이 되면 엄마랑 한글 배우는 거라고 아이에게 말해두긴 했지만 따로 준비를 해둔 건 없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궁리 중이다.

사실 지난해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가 흐지부지된 경험이 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아이가 여러 면에서 성장했지만 공부 이야기를 꺼내려니 걱정되는 점이 있다. 한 번의 실패였을 뿐인데 아이가 한글 공부가 어렵다고 여기는 눈치기 때문이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자 한글을 익힌 친구들이 점점 늘어났다. 자신이 먼저 의사를 밝힌 만큼 우리 아이도 다른 친구들처럼 잘 해내겠거니 기대했다.

우선 낱말카드를 이용해 놀이처럼 접근하려고 했고 집에 한글 벽보를 붙여 자연스럽게 한글에 노출되도록 이끌었다. 이후 엄마표 한글 교육서로 입소문 난 책을 사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아무 소득 없이 공부를 접고 말았다. 엄마가 잘한다 칭찬해도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공부였다. 아이로서는 힘든 공부를 고집할 이유가 없으니 포기가 빨랐다. 과감하게 더 밀어부칠 수도 있었겠지만 하기 싫다는 공부를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아서 쿨하게(!) 책장을 덮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이 힘이 될 때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다, 밀어넣기보다 못해도 되고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걸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이가 근성을 갖고 도전하기보다 쉽게 포기를 선택할까 걱정도 된다.

아이를 훈육할 때 때때로 고민에 빠지는 지점이다.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엄마는 줄타기하듯 고민을 이어간다. 아이를 한 해 두 해 키울수록 육아의 지혜가 커질 줄 알았는데 아이 키우는 일은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게 없다.

한글 공부, 고군분투한 흔적
한글 공부, 고군분투한 흔적 ⓒ한희숙

어쨌든 한글 교육 관련 TV 방송을 틀어줬더니, 그림책을 많이 읽어줬더니 저절로 한글을 떼더라는 기적 같은 일은 우리 아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영특함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더불어 자식 공부 가르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깨달았다. 아이는 몰라도 너무 몰랐고 가까스로 외운 것도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아이가 느꼈을 답답함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나대로 속이 터져나가는 경험이었다. 지난해 공부를 금방 접었던 데는 이런 상황을 감당하기 싫어 피했던 측면도 있다. 교재들을 비교해 좋다는 책을 구입하고 교수법을 찾아보고 엄마표 교구를 준비하는 노력은 물론 필요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엄마 선생님이 준비할 게 더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책 「점」(피터 레이놀즈, 문학동네어린이, 2003년)에는 하얀 도화지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아이가 나온다. 아이의 망설임이 낯설지 않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막막해 하는 책 속의 아이는 나이기도 하고 내 아이기도 하다. 새로운 배움 앞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는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무엇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이에게 길을 터주는 이는 선생님이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 보"라는 게 선생님의 주문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면 이 또한 의미 있음을 보여준다. 책 속의 선생님은 이렇듯 아이가 할 수 있는 것만큼 제안한다.

그림책 [점]의 한 장면
그림책 「점」(피터 레이놀즈, 문학동네어린이, 2003년)의 한 장면 ⓒ문학동네어린이

사실 출발은 여기서부터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이후 아이는 다양한 점의 세계에 빠져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림책 마지막에 이르면 점 작품들로 가득한 전시장이 펼쳐진다. 아이의 발전에 마음이 찡해진다. 교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그림책이지만 부모에게도 역시 유의미한 책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북돋아줘야 하는 수많은 순간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좋을지 생각해보게끔 이끈다.

며칠 전부터 아이에게 다시 이름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이제는 꽤 많이 써봤음에도 아이는 제 이름 석 자 쓰기를 어려워한다. 특히 받침이 있는 자는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바로 따라서 써보라고 해도 망설인다. 획 하나씩 알려주는데도 쉽게 연필을 움직이지 못하니 답답하다. 아이가 머뭇거리는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재촉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아이에게 내색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순간이 반복되더라도 인내하는 것이다. 글씨를 썼다기보다 그렸다고 보는 게 옳은 결과물을 아이가 내놓더라도 칭찬으로 힘을 실어주는 일도 엄마 선생님인 내 몫이다. 하얀 도화지를 보고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발견하는 엄마, 새로운 배움 앞에서 아득함을 느낄 아이에게 점을 찍을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엄마가 돼야지 다짐해본다.

올 한 해 아이와 지지고 볶다 보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결국 한글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난해 도전을 통해 아이가 한글을 많이 익혔다면 나는 영어라든가 수학이라든가 다른 공부에 눈을 돌렸을 것이다.

아이에게 공부 스트레스를 안 주고 싶다, 노는 게 최고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아이가 잘하는데 욕심을 안 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한글 공부가 늦은 덕분에 아이는 공부에 힘빼지 않고 한 해 더 즐겁게 놀았다. 또래 친구들보다 뒤처졌지만 충분한 보상이다.

*칼럼니스트 한희숙은 좋은 그림책을 아이가 알아봐 주지 못할 때 발을 동동 구르는 아기엄마이다. 수년간 편집자로 남의 글만 만지다가 운 좋게 자기 글을 쓰게 된 아기엄마이기도 하다. 되짚어 육아일기 쓰기 딱 좋은 나이, 일곱 살 장난꾸러기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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