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난 조카가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고 나섰다. 동네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다며 내일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받았단다. 조카는 대입 시험도 치러냈으면서 아르바이트 면접 앞에서 한없이 초조해했다.
"별거 아니야. 바르게 행동하면 웬만하면 다 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의 응원도 그녀의 조바심을 다독이지 못했다. 그리고 면접 날. 아이는 온갖 호들갑을 다 떨더니 '면접 잘 본 것 같다고, 사장님이 엄청 좋으신 것 같다'고 좋아했다. 거봐, 별거 아니라니까. 이제 너도 네 손으로 돈을 벌어보겠구나.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아이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겠구나 싶었다.
아르바이트 전 날이었다. 조카가 몹시 당황해서 나에게 연락을 했다. 무슨 일인고 하니 사장님께 근로계약서는 언제 쓰냐고 물었단다. 아르바이트를 몇 번 해본 지인에게 근로계약서는 쓰고 일을 시작하라고 조언을 들었나 보다.
그런데 사장님의 답변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근로계약서 쓴 것과 안 쓴 것의 차이점이 뭐냐'며 '왜 그걸 요구하냐'고 되물으셨다. 조카는 '궁금해서 물었다'고 답했고, 사장님은 '너무 아는 척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며 '널 잘못 본 것 같다'고 '일 나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그 후 나에게 SOS를 한 것이다. 어렵게 구한 아르바이트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말이다.
"…."
뭐라고 해줘야 하는 걸까. 한참 고민스러웠다. 원래는 쓰는 게 맞는데 안 쓰는 곳도 있고, 그게 그러면 안 되는데 그냥 묵인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그걸 물어보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그렇다고 그게 맞는 건 아닌 거고… 결국 나는 횡설수설했다. 그런 뒤처진 문화를 우리가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말 따위는 차마 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왜 화가 나셨을까. 일도 시작하지 않은 꼬맹이 녀석이 당당하게 근로계약서를 운운하니 괘씸하셨을까? 바른 말 "따박따박" 하는 이런 녀석을 우리 가게에 두면 두고두고 불편한 일이 있을 것 같으셨을까? 근로자를 고용하면서 근로계약서 쓰는 것을 당연시했다면 그분, 화가 나기는 했을까?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7월부터 두 달 동안 전국 청소년 1만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청소년 중 61.6%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적이 없었다고 답했다. 작성은 했지만 작성된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한 청소년도 42%나 됐다.
실로 놀라운 수치지만 그리 놀랍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 기성세대 역시 어렸을 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로계약서 같은 것은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래도 38.4%는 쓴다는 거네, 생각보다 많다' 할지도 모르겠다.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61.6%의 아이들이 근로계약서를 쓰고 싶다고 했다면 그 아이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수 있었을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다양한 계약서를 쓴다. 그 많은 계약서 중 근로계약서만큼 치사하고 야박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전세 계약서를 쓸 때에도 그렇다. 그 역시 약자인 임차인을 보호하는 장치인 셈인데, 임차인이 계약서를 쓰자고 해서 화내는 임대인은 결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계약서 쓴 것과 안 쓴 것의 차이가 도대체 뭐냐며, 왜 그걸 요구하냐며, 정말 나를 못 믿냐며, 잘난 척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며, 이 계약은 할 수 없다고 돌아서는 임대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근로계약서 앞에서는 그리 팍팍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근로계약서를 쓰겠다는 아르바이트생 앞에서 우리 어른들이 화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근로계약서를 언제 쓰나요?'라는 물음이 더 이상 버릇없는 질문이 아닌 자연스러운 물음인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더 나아가 그런 의문을 품는 아르바이트생이 없어야 하겠지만). 당당하게 묻고 또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일터에서 우리 아이들이 일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칼럼니스트 김경옥은 아나운서로, ‘육아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일하는 엄마, 육아하는 방송인’이다. 현재는 경인방송에서 ‘뮤직 인사이드 김경옥입니다’를 제작·진행하고 있다. 또한 ‘북라이크 홍보대사’로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책읽기를 지도하는 일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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