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리틀 포레스트'… 생명과 돌봄을 생각하다
내 안의 '리틀 포레스트'… 생명과 돌봄을 생각하다
  • 칼럼니스트 백운희
  • 승인 2019.02.1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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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키우는 아이] 텃밭과 아이

해가 바뀌고도 한 달이 더 지났다. 아이는 요즘 한 살이 늘었다며 신이 났다. 나는 나이 대신 계절의 흐름이 반갑다. 머지않아 얼어붙은 땅을 풀어줄 해토비가 내리고, 싹이 돋아날 것이다. 그러면 텃밭에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텃밭에 다녀온 건 첫눈이 오고 여러 날이 지나서였다. 밭에는 미처 거두지 못한 배추가 잎을 한껏 펼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수확시기를 놓쳤더니 아쉽게도 노랗게 속 찬 배추는 몇 포기 되지 않았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모아 배추를 뽑아내고 땅을 돋우었다. “고마웠다”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한 해의 추억이 곳곳에서 스쳐갔다.

텃밭농사는 서울시 친환경 농장프로그램 신청 공고를 우연히 접하고 시작했다. 일 년에 몇 만원을 내면 크지도, 적지도 않은 면적의 텃밭을 가꿀 수 있었다. 아이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동의했다. 우리는 경기도 양평의 공동텃밭 중 1필지를 빌렸다.

작년 이맘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을 무렵이었다. 늘 품고 사는 귀촌 본능과 농사를 짓고 싶다는 욕구에 불을 붙인 이 영화가 텃밭 행에 한몫을 했다. 물론 같은 ‘농사’라는 단어로 자녀 양육과 이를 연결한 연구와 글들도 영향을 미쳤다.

최근엔 ‘치유농업’ 또는 ‘녹색치유’라고 해서 경쟁이 치열한 도시생활에서 얻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질병을 농업을 통해 치유하려는 프로그램도 눈에 띈다. 기사에 인용된 농업진흥청의 연구 결과를 보면 부모와 자녀가 텃밭 등에서 함께 식물을 기르면 부모의 스트레스와 자녀의 우울감이 모두 줄어든다고 한다. 특히 아이들은 텃밭 등에서 식물을 기르면 우울감은 낮고 공감능력은 향상된단다.

게다가 병원이나 공공청사 등 고층건물의 옥상정원, 하천변 유휴 부지 등을 활용한 도시농업에 관심이 늘면서 손쉽게 참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이가 딛고 있는 환경은 내가 자란 그것과 다르다. 주변에 논과 들이 펼쳐져 있었기에 이맘때면 논밭에는 냉이가 돋아나고, 쑥이 올라올 즈음 봄볕이 더욱 익어간다는 지식이자 감각을 나는 체득했다. 감자와 고구마 잎이 어떻게 다른지, 사과와 배꽃의 차이는 뭔지 역시 절로 안다.

그러나 아이는 오히려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 속 활자를 통한 지식이 가깝고 흡수가 빠를 지도 모른다. 모내기 할 무렵 무논에서 볼 수 있던 땅강아지나 익은 벼 끝에 말려 흔들거리는 메뚜기의 모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흙을 쉽게 만질 수 있는 환경도 아니지만 시각도 바뀌었다. 깔끔한 성격으로 물티슈나 손수건을 들고 아이 뒤를 따라다니던 친구의 경우, 아이가 기관 보육을 시작하면서 점토놀이나 미술활동 자체를 거부한다며 고민을 토로했다. 손이나 옷에 뭔가 묻는 것은 더럽다고 인식한 아이의 반응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일상에서 흙을 만지며 노는 일은 확실히 희박해졌다. 이 같은 환경에서 자랄 아이에게 다른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수박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수박

1필지에 불과했지만 초보 농사꾼들에게는 이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당연하게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빛나는 일상은 아니었다. 신발과 옷은 흙으로 덮였고 손톱 밑에 때가 꼈다.

수확의 기쁨도, 실패의 쓰라림도 있었다. 상추는 역시 노력 대비 더 큰 성과를 내는 효자 작물이었다. 적상추, 청상추를 반씩 심었는데 오래지 않아 잎이 풍성해지더니 주말에 갈 때마다 이웃들과 나눌 만큼 넉넉한 양을 수확할 수 있었다.

밭 시금치와 아욱 역시 한두 끼니를 먹을 만큼 거뒀다. 시금치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도 길이가 짧고 여린 노지시금치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아욱 역시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보다 보드라웠다. 땅콩도 기대 이상이었다. 생각보다 작황이 좋아 거두는 보람이 더욱 컸다.

아쉬웠던 것은 옥수수였다. 한여름에도 키를 쑥쑥 키워가던 옥수수는 뒤늦게 찾아온 태풍에 일부가 쓰러지고, 일부는 산짐승의 먹이가 됐다. 옥수수를 딸 것이라고 한껏 부풀어 있던 아이는 열매가 모두 사라진 현장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래도 한 개는 남겨줬어야지”라며 앞산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웃음이 났다.

겨우 한 해였지만 텃밭 농사를 통해 아이는 어슴푸레 와닿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작물의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생육을 익히게 하는 동시에 노동 없는 생산 없고, 땀 흘리고 얻는 수확이 더욱 값지다는 깨달음이랄까.

특히 제철 작물이 뭔지 익히면서, 봄 딸기, 여름 포도, 가을 사과 ,겨울 귤 같은 공식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제철 작물이 없는 세상은 편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서운 변화를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뜻 깊었다. 아울러 농약을 쓰지 않은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지만 흠집이 있거나 벌레가 먹은 상품은 꺼리는 세태가 왜 문제인지도 말이다.

그러나 아이가 무엇을 보고 느꼈을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적어도 주말마다 텃밭에 들르려고 노력을 했지만 아이는 농장 가는 일을 반기기도 했고, 귀찮아하기도 했다. 한껏 신이 난 날은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는 가하면 물을 주고, 지지대를 세워 노끈으로 묶는 것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것저것 묻고 탐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텃밭 구석에 마련된 그늘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시원한 음료수를 먹으며 엄마와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거나 지겨움을 견뎌내는 날도 분명 있었다. 물론 이전에는 알 수 없었을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와 함께 텃밭 농사를 지으며 생명의 소중함과 노동의 가치. 돌봄의 중요성과 생명에 대해 깨닳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아이가 무엇을 보고 얼만큼 느꼈을 지는 모두 알 수 없다. 양육자로서 그저 함께 노력할 뿐.
아이와 함께 텃밭 농사를 지으며 생명의 소중함과 노동의 가치. 돌봄의 중요성과 생명에 대해 깨닳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아이가 무엇을 보고 얼만큼 느꼈을 지는 모두 알 수 없다. 양육자로서 그저 함께 노력할 뿐. ⓒ백운희

다만 양육자로서, 함께 농사를 해온 동료로서 아이가 텃밭에서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단연 자연과 생물의 소중함이다. 식료품 새벽 배송 광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주하는 요즘, 돈을 주면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재가 아닌 생산재로서, 수단이 아닌 존재로서도 작물을 인식하길 바랐다.

또한 이웃의 존재를 생각해보길 원했다. 양 옆 텃밭에는 개장 초기 두어 번 정도만 사람이 다녀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풀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나중에는 우리 텃밭이 이들에게 갇히는 형국이 됐다. 갈 때마다 밭으로 건너온 풀을 쳐내야 했다. 모두 뽑아내고 싶었지만 우리 것이 아니었기에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풀 더미를 은신처 삼아 놀고 있던 개구리가 뛰쳐나와 놀라기는 예삿일이고, 벌에 쏘이기도 했다.

관리처를 통해 대책을 문의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우리 삶도 주변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이웃에 따라 삶의 면적이 넓혀지기도 좁혀지기도 한다.

그리고 돌봄이다. 작물은 홀로 살아날 수 없다. 땅의 힘, 태양, 날씨 등의 영향을 받는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가꾸는 이의 돌봄도 필수적이다. 누구나 응당 ‘돌봄’을 익히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봄은 경험을 통해 체득된다. 돌보려는 마음 못지않게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돌봄은 결국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수반하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텃밭에서는 돌봄의 중요성과 함께 자연의 흐름 속에 깃는 삶과 죽음을 절로 생각하게 한다.

전 생애를 통해 세상에 기억되면서 죽음 앞에서도 추모받은 이름이 있다. 그런가하면 죽음으로서 비로소 세상을 향해 뉘우침과 깨달음을 전하는 안타까운 이름도 있다. 그리고 이름이 없는 죽음도 여전히 숱하다. 작년 한 해 사업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이가 천여 명이다. 일터는 물론 학교와 군대와 집단에서, 보금자리에서마저 사라져간 생명을 떠올린다.

이들을 새기고 기억하려는 마음으로 새 해, 새 봄, 텃밭을 기다린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길지도, 왜 그렇게 묵직해야 하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한 해의 시작이 반드시 경쾌해야 하고 무거워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을 거라고 여기며.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 하듯이”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

*칼럼니스트 백운희는 여전히 육아와 관련한 이야기에는 흔들리는 눈빛과 팔랑거리는 귀를 가지고 초등생 딸을 키우고 있는 전업모입니다. 아이와 함께 부모로 성장하며 겪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조금 덜 실망하고 좌절하는 육아 팁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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