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음식 하고 여자는 먹고… 한번 해볼까요?
남자는 음식 하고 여자는 먹고… 한번 해볼까요?
  • 칼럼니스트 김경옥
  • 승인 2019.02.18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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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 이번 명절에도 왜 나만 일해?

 설 명절을 앞두고 주방에서 한참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남편이 나를 불렀다.

"여기 티브이 좀 봐봐. 얘, 노래 진짜 잘한다."

"어?"

"얼른 와서 봐봐~ 얼른~. 에이, 지나갔다."

가만 거실을 봤다. 거기에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냥 남자 말고 티브이를 보면서 여유를 부리는 행복한 남자들이 있었다. 주방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일을 끝낼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요리하는 틈틈이 설거지를 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시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 남자들은 왜 저기서 저렇게 놀고 있어요? 진짜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옛날에는 더 심했죠?"

"옛날에는 훨씬 더 심했지. 명절이 되면 아버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술상 봐오라'고 했어. 그러면 밥 먹고 치우다가 술상 내오고 또 치우고 또 밥상 내오고 그랬지."

"너무 화나지 않으셨어요?"

"화가 났지. 그래도 뭐 어떻게 해, 그냥 그렇게 하는 건가 보다 했지."

"술상을 차려주고 확 엎어버리지 그러셨어요."

어머니가 깔깔 웃으셨다.

다음 날 남편에게 말했다.

"언제쯤 이런 문화가 달라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그래도 많이 달라졌는데 뭘 그러냐고. 여자들, 그래도 옛날에 비해 얼마나 편해졌냐고. 그런데도 불평한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많이 달라졌다니까.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완전히 바꿔보는 것이다.

다음 명절에는 남자들이 주방에 들어간다. 여자들이 해오던 음식을 그대로 만들어보는 거다. 무슨 음식을 할까 고민하는 것부터 장 보는 것,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 깔끔하게 상차림 하는 것까지 해보는 것이다. 참, 설거지하고 정리하는 것도 있네.

여자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티브이를 보다가 엄청 재밌는 장면이 나오면 남자들에게 중계를 해준다. 가끔씩 '얼른 와서 한번 보라'는 자상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출출하다 싶으면 주방을 기웃거리다 전이나 부침개를 하나 집어먹으며 엄지를 번쩍 든다.

남자가 음식을 준비하다 어려움에 봉착하면 여자는 기세 좋게 주방으로 들어가 '간이 싱거우니 간장을 넣어보라'고, '조선간장은 두 번째 선반에 있다'고 얘기해준다. '그래도 이번 설에 남자들을 나름 돕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방에서 퇴장한다.

손님이 오시면 여자들은 앉아서 남자들이 준비해온 밥상과 술상을 받는다. '내가 너무 하는 일이 없나' 싶어 남자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면 가끔 상을 받아들고 오거나 수저를 세팅한다. 손님들과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손님들이 가시고 남자가 여자를 방으로 조용히 부른다.

"당신 이번 설에 너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 아니야?"

여자는 '올 게 왔다'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또 그 레퍼토리를 꺼내 반격한다.

"나는 뭐 술 마시고 싶어 마셔? 오늘은 술 진짜 마시기 싫었어. 그런데도 작은아버지 오시고 그러면 마셔야지 어떡해. 이렇게 손님 접대하는 거 나도 힘들다고. 나는 또 운전도 하잖아."

여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래도 당신 정말 수고 많았다'며 슬쩍 남자의 어깨를 주무른다. 남자가 못 이기는 척 가만히 어깨를 맡긴다. 다행이다.

설 명절에 남녀의 역할이 바뀐다면?
설 명절에 남녀의 역할이 바뀐다면? ⓒ김경옥

"어떨 것 같아?"

"…."

"이렇게 진짜 경험해보면 '여자들 그래도 많이 편해졌다'는 말 못할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특히 해봐야 한다니까. 백날 말해봐야 소용없어."

"…."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얼마 전 언니네 식구를 만났다. 늘 그렇듯 아주 자연스럽게 남편들은 술상을 폈고, 언니와 난 자연스럽게 아이들 밥상을 준비했다. 아이 밥을 먹이는데 저쪽에서 술 한잔을 기울이며 남편이 말한다.

"얼른 와~ 같이 먹자."

"응, 아이 밥 먼저 먹이고."

이 장면, 어디선가 본 장면 같다. 아니, 언젠가 경험한 장면이다. 아니, 매번 이랬다.

"너무 이상하지 않아? 왜 늘 아빠들은 거기서 술을 마시며, 딱 맛있을 때 음식을 먹고 엄마들은 아이 밥 먹이기 바빠?"

여전히 반대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니네 식구들을 만나면 아빠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술을 마실 것이며 어떤 안주를 곁들일 것인지 고민한다. 회가 좋을지 치킨이 좋을지, 치킨을 먹는다면 후라이드로 할지, 간장 양념이 좋을지 고민하고 사이좋게 의견을 나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서 먹일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나는 그래도 잘하는데….' 혹시 억울해하는 아빠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덧붙이자면, 아빠들이 육아에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늘 아내의 육아를 '돕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절대 앞서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B급 며느리'에서 주인공인 진경 씨가 말했다.

"봐봐, 이상하잖아. 사지 멀쩡한 네 명의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었는데 어머니랑 나랑 둘만 일어나서 '네가 일하네, 내가 하네.' 투닥거리는 게 진짜 이상하지 않아?"

그렇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상하게 참 오랜 시간 살아왔다. 그래서 그 이상한 것을 좀 바꾸고 싶다. 너무 이상해서.

*칼럼니스트 김경옥은 아나운서로, ‘육아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일하는 엄마, 육아하는 방송인’이다. 현재는 경인방송에서 ‘뮤직 인사이드 김경옥입니다’를 제작·진행하고 있다. 또한 ‘북라이크 홍보대사’로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책읽기를 지도하는 일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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