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언니가...”
뭔가 하나를 해주면, 그 틈을 타서 열 개를 얻으려는 윤이(둘째 가명)다. 그만큼 욕심이 많다. 나를 더 시켜먹으려고 하고, 뭐라도 하나 더 얻어내려고 한다. 그야말로 협상의 달인(이라 쓰고 우기기의 달인이라 읽는다)이다.
베트남에 와서 느껴보지 못한 자매애를 발견하고 기쁠 때도 많았지만,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도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서 그냥 넘어 가다가도 나도 내 성질을 이기지 못할 때가 오더라는 말이다. 무리한 요구를 할 때. 그날도 그랬다. “엄마, 언니가...”, “엄마 왜 언니만...“ 이 말을 한 열 번쯤 했던가. 내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이런 내 기분을 윤이에게 알려야 한다. 안그러면 내 감정이 폭발할 테니까.
“엄마는 네가 그런 말 좀 안 하면 좋겠어요. 기분이 안 좋아져요. 왜 자꾸 언니 하고 비교하는 말을 해요? 언니는 언니고, 너는 너잖아. 언니가 하는 걸 네가 다 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언니는 너가 하는 걸 다 해 달라고도 하지 않잖아요. 그건 네 말대로 공평한 게 아니지 않나요?”
둘째에게 훈육할 때면 일부러 존댓말을 쓴다. 내 나름의 자정 장치다. 몇 번의 ‘엄마 갑질’ 이후 내가 스스로 내린 처방이다. 존댓말은 엄마 갑질을 막는데, 나름 큰 도움이 된다. 훈육할 때 내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은 몹쓸 말들을 덜 하게 된다. 내가 존댓말을 쓰면 아이도 훈육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비교적 차분하게 자신의 기분과 상황을 말하려고 애쓴다.
“엄마, 언니가...“
“윤아... 왜 또 그래. 언니랑 엄마는 지금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잖아요.”
“그럼 나는?”
“윤이도 지금 이 시간은 윤이가 할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거의 울기 직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잖아.”
“그게 뭔데요?”
“(울면서) 어제 언니가 쓴 글... 그거 보고 싶은데, 언니가 못 보게 하잖아.”
“윤아, 언니가 쓴 글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 언니 마음이지. 그걸 엄마가 억지로 보여주라고 할 수는 없어.”
“그래도 왜 못 보게 하는데!”
이정도면 답이 없는, 도돌이표 대화가 될 조짐이다. 윤이와 공간을 분리해 있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거실에서 방으로 갔다. 잠시 우는 소리로 시끄러워지는가 했더니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윤이. 눈물은 거둔 상태였다.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 왔어요? 말해 봐요.”
“내가 아까 말했잖아.”
“네가 엄마한테 한 말이 많은데, 뭘 말했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좀 구체적으로 말해줄래요?”
“내가 아까 말했는데, 왜 또 말하라고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데...”
“네가 아까 한 말은 언니가 쓴 글을 보고 싶다는 거였잖아요. 근데, 그건 언니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니까, 지금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요.”
“그거 말고, 내가 또 말했잖아. 엄마는 왜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데? 왜 또 말하라고 하는데?”
뭐지? 뭐였지? 난 정말 그것 말고는 들은 게 없는데...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반은 듣고 반은 흘려들은 건가? 도무지 기억 나는 게 1도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빠른 사과뿐이다.
“미안해. 엄마가 들은 건 그게 전부야. 뭐 다른 걸 말했니?”
“구몬스터....”
“응? 구몬스터가 뭐야.”
“어제 쓴 글 말고... 언니가 지난 번에 쓴 다른 글, 구몬스터 보고 싶다고...”
“그, 그런 게 있었어?”
확인해보니 구몬스터 글은 진이(큰아이 가명)가 이미 동생에게 한번 보여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으로 협상 타결. 그렇게 또 한번의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윤이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왜 내 말은 귀 기울여 듣지 않느냐?”라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사실 윤이 말 뿐만 아니라 진이가 하는 말도 잘 듣지 못할 때가 더러 있는 것 같다. 자꾸 깜빡하는 일이 생기고, 요즘에는 특히 말도 헛나와서 본의 아니게 아이들에게 큰웃음을 주는 경우도 생긴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할 때면 내가 왜 이러지 싶기도.
그럴 때마다 그저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나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입장에서는 내가 예전보다 자신들의 말을 덜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음은 오히려 정반대인데... 그래도 "이제라도 더 잘 기억할게"라고 말해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잘 기억할 자신이 없다. 더 큰 오해가 생기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다다야... 엄마가 예전보다 관심이 줄어서 너희가 한 말을 기억 못하는 게 아니야. 기억해야 할 게 많은데, 엄마 뇌도 나이가 드니까 너무 많은 걸 기억하기가 어려워서 그러는 것 같아. 그러니 정말 중요하고 기억해야 할 건 적어 주거나, 엄마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지 꼭 확인해 줘. 짜증 내지 말고. 엄마는 컴퓨터나 기계가 아니잖아. 너희들이 도와주면 엄마가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알았지?”
이후로도 내가 우려한 대로 못 듣는 일은 계속 생겼다. 그럴 때마다 윤이는 속상해 하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엄마 내 말 못 들었어요?"
못 들었다고 하면 내 눈을 보며 "잘 들어요" 하고 다시 말해주었다. 내가 내 부족함을 알려주기 전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그런 아이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오마이뉴스 기자로,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 연재기사를 모아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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