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좋은 아이와 여행병 걸린 엄마
집이 좋은 아이와 여행병 걸린 엄마
  • 칼럼니스트 한희숙
  • 승인 2019.02.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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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한 장, 육아일기 한 줄] 아이와 함께 꿈꾸는 여행

작년 이맘때 아이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뒤 지도책을 한 권 구입했다.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아이에게 영국이 어디인지 알려줄 요량이었다. 제일 먼저 우리나라 지도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을 펜으로 표시했다. 그다음 아이가 가 본 서울이나 부산 등지에서 우리 동네까지의 거리를 보여주었다. 아이로서는 멀다고 느낀 길이었을 테지만 지도에서는 제 작은 손안에 들어오는 거리였다. 

나는 흥이 나서 열정적으로 설명했는데 아이는 심드렁했다. 그런데도 나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가려면 우리 집에서 공항을 찍고 다시 몇 시간 비행을 해야 하는지 손가락으로 경로를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세상이 이렇게 넓구나"하며 아이가 눈을 반짝이길 바랐지만 엄마의 욕심이었다. 영화를 본 뒤 아이가 낯선 나라에 대해 호기심을 보인 건 분명했지만 더 이상의 확장도 지속도 어려웠다. 나라와 도시를 구분 못해서 부산도 우리나라인지 묻는 아이에게 영국이 대수겠는가. 지도를 보고 들뜨는 건 '여행병' 걸린 엄마뿐이었다.

언젠가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떠들었다.

“엄마, 친구들도 우리나라에 산대.”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자초지종을 따져봤더니 아이는 그동안 우리가 사는 동네만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린이집 친구 중에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다곤 하지만 우리 아이의 인식 수준은 그 정도였다. 아이에게는 놀라운 발견이었고 나에게는 잊지 못할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드물게 지도책을 펼쳐봤고 그 사이 아이는 쑥쑥 자랐다.

그로부터 한 살 더 먹은 아이는 이제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을 주워섬길 정도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 다녀온 해외 여행지가 어디인지 기억하며 엄마가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안다. 한동안 아이는 잠자리 동화로 세계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즐겼는데 지역 특색이 잔뜩 묻어난 이야기에 특별히 흥미를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본디 재미있는 이야기란 어린아이의 마음을 단번에 훔치는 법이지만 일 년 사이 아이의 시야가 많이 넓어졌음은 확실하다.

잠자던 지도책을 들춰보는 일도 잦아졌다. 지도를 앞에 두고 내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늘 비슷하다. 세상은 넓으니까 어른이 되면 이 나라, 저 나라 여기저기 다녀보라는 것이다. 여행도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임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아이가 여행을 즐긴다면 길 위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배움을 얻으며 이를 통해 삶을 풍성하게 가꿔나갔으면 좋겠다.

그림책 「마음이 퐁퐁퐁」의 한 장면. ⓒ천개의바람
그림책 「마음이 퐁퐁퐁」의 한 장면. ⓒ천개의바람

여행을 가라는 내 당부에 아이가 보이는 반응도 매번 비슷하다. “그럼 엄마는?” 엄마 없이 어떻게, 왜 여행을 가냐는 물음이다. 네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나이를 더 먹으면 너 혼자 다니는 게 좋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와 떠날 수도 있다고 답해준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인 것 같다. 엄마가 함께하겠노라 단단히 약속한 뒤에야 여행을 가겠다는 대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마음이 퐁퐁퐁」(김성은 글, 조미자 그림, 천개의바람, 2017)에는 세상 구경을 떠나는 아기 돼지가 나온다. 엄마는 아이의 배낭을 메줄 뿐 여행길에 동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는 씩씩하게 여기저기를 다니며 친구들을 사귀고 세상을 두루 경험한다. 아기 돼지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음을 나눠주고 온 아기 돼지는 제 마음이 없어진 것 같다며 근심한다.

그때 지혜로운 엄마 돼지는 “마음은 샘물 같아서 얼마든지 퐁퐁퐁 솟아난다"고 조언한다. 아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따뜻하게 품어주고 아이가 고민하는 부분에 대해 나아갈 길을 터주는 엄마의 모습이다. 그 덕분에 아이는 엄마 품에서 힘을 얻고 다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든든한 울타리, 편안한 휴식처, 지혜로운 안내자가 부모의 역할임을 이 그림책도 틀림없이 말해준다.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늘어놓는다. 세상은 어땠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이의 대답은 명쾌하다. “세상은 정말 멋져요!” 아기 돼지의 말에 공감한다. 좋은 것을 아이와 함께 나누고 싶은 건 엄마로서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가 그림책 속 아이처럼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궁금증을 품고 탐구하기를 바란다. 아이가 세상은 정말 멋진 곳임을 마음 깊이 느낀다면 정말 좋겠다.

그런데 우리 가족의 여행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아이가 여행을 망설인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의 여행은 떠날 때도 애를 태우게 하지만 여행지에서도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다. 큰마음 먹고 해외여행길에 올랐는데 집보다 더 좋은 호텔방에서 집에 가겠다며 아이는 목놓아 울었다. 아이와 단 둘이 제주 여행을 갔는데 캄캄한 밤, 또다시 집에 가겠다고 해 나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동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겠다며 울어버리는 통에 그 뒤로는 여행지에서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는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담겨 있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상기시켜주곤 한다.

“그 안에만 있으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지만 좋은 일도 안 생길 거야.”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지내고 싶어 하는 겁 많은 아기 공룡에게 아빠가 건네는 따뜻한 응원 메시지다. 다행히 아이가 클수록 여행의 즐거움을 조금씩 느끼며 여행을 바라보는 시선도 유연해져가는 것 같다. 잠은 집에서 자자고 하지만 어디에 가보고 싶다며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한다.

아이의 그 말에 힘입어 나는 제주와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야심차게 계획 중이다. 가깝게는 3월 새 학기 전 짧은 여행도 있고 4월 봄꽃이 무르익으면 가보려고 물색해 놓은 여행지도 있다. 엄마는 이렇게 아이와 함께할 여행을 매일 꿈꾼다. 때마다 아이와 함께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곳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한희숙은 좋은 그림책을 아이가 알아봐 주지 못할 때 발을 동동 구르는 아기엄마이다. 수년간 편집자로 남의 글만 만지다가 운 좋게 자기 글을 쓰게 된 아기엄마이기도 하다. 되짚어 육아일기 쓰기 딱 좋은 나이, 일곱 살 장난꾸러기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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