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육아, 나를 너그럽게 만들었다
결혼과 육아, 나를 너그럽게 만들었다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9.03.0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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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육아감옥] '결혼'이라는 DIY(DO IT YOURSELF) 키트 사용법

지난 연말·연초, 치앙마이에 한 달 넘게 머무르면서 거의 요리를 하지 않았다. 아침은 주로 빵이나 과일 정도로 남편이 간단하게 차리고, 점심 저녁은 밖에서 해결했다. 워낙 먹을거리도 많은 데다가 물가도 싸서 태국 음식을 원 없이 맛있게 먹었다.

가끔 한국의 매운맛이 그리운 날이면 남편은 숙소 근처 마트에서 삼겹살을 사다가 고국에서 고이 모시고 온 통조림 김치를 넣고 두루치기를 했다. 삼겹살 구워지는 냄새, 김치 냄새로 방안이 가득 찼다. 식탁에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익숙한 냄새가 불러오는 나의 일상을 떠올렸다. 부엌에서 종종거렸던 나는 그곳에 없었다.

끼니를 내 손으로 챙기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은 편했다. 설거짓거리가 많지도 않았고 매일 메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요리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 것 외에 일상적인 정신노동도 없어진 셈이었다. ‘뭘 해서 먹지?’가 아니라 ‘먹고 싶은 걸 먹자!’가 되었다.

‘균형 잡힌 식단’은 가정을 꾸리는 사람에게는 강박이다. 그걸 해내는 것은 숙제 같고, 못 해내는 것은 문제 같다. 숙제도 문제도 없으니 나는 한없이 게을러졌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아침을 준비하는 남편이 무얼 사놓았는지, 뭐가 남아있는지도 모르게 됐다. 모르니까 더 안 하게 됐다.

치앙마이 숙소. 연이 뒤로 빨래를 널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신은률
치앙마이 숙소. 연이 뒤로 빨래를 널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신은률

빨래도 남편이 맡았다. 숙소에서 5분쯤 걸어 나가면 코인 세탁소가 있었다. 이삼일에 한 번꼴로 남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해왔다. 젖은 빨래는 거실 앞 작은 테라스에 널었다. 볕이 좋았다.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옷가지들은 금세 보송해졌다.

한날은 남편이 빨래를 널면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구나”하고 투덜거렸다.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짓궂게도, “그게 평소 내 기분이야”라고 대꾸했다. 그러고는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주섬주섬 빨래 너는 걸 ‘도왔다’. 집에서 요리도 곧잘 하고 집안일도 눈치껏 잘하는 남편은 새치름해졌다.

의도치 않게 살림을 살지 않게 되자 치앙마이가 더 좋아졌다. 내가 일을 하지 않아서 좋기도 했지만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아서 좋았다. 바라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식사 준비도, 장보기도, 빨래도, 애들 목욕도 남편이 했다. 치앙마이에선 남편이 주부였다. 많은 부분을 남편에게 맡기고 신경을 툭 껐더니 오히려 그동안의 일상이 어땠는지 가늠이 되는 듯했다.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날들이 우리에게 다른 삶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부부가 잠시나마 일상을 버릴 수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어설프게 바꿀 수 있어서, ‘공통의 삶’이 환기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의 차이

평소에도 마트에 가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나보다 꼼꼼히 장을 봤다. 그림처럼 보이는 글자 속에서 가족들 입에 맞는 걸 고르려는 그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특히 연이가 좋아하는 망고를 고를 때 그랬다. 망고가 완숙처럼 보여도 부르르 떨릴 만큼 시큼하거나 생각보다 많이 익어 속에서 물러버린 경우가 종종 있다.

남편은 농부의 아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상의 망고를 찾아냈다. 어쩌다 맛없는 망고를 고른 날이면 으레 남편 몫이 됐다. 사과나 배를 깎고 남은 부분을 ‘엄마’가 베어 먹듯, 칼을 든 남편이 자연스럽게 ‘나머지’를 담당했다. 그건 왠지 책임의 다른 이름 같아 보였다.

새로운 과일에 관심을 갖고, 맛있는 빵을 찾고, 라임과 레몬 중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 재료를 고르는 남편. 무림의 숨은 고수를 발견한 듯 ‘주부’가 된 남편이 수제자처럼 든든하게 보였다. 남편은 의지도 실력도 책임감도 있는, ‘괜찮은 떡잎’이었다. 다만 집에서는 시간이 부족할 뿐이었다.

남편의 집안일은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이벤트였다. 저녁을 차리겠다고 나선 남편은 우리집 싱크대 앞에 서서 여러 재료나 각종 양념들을 나에게 물었다. 일상은 묵묵히 흘러가지만 이벤트는 요란한 법이니까. 남편의 이벤트는 ‘일상’에 의지했고, 일상을 아는 사람은 어쩐지 더 많은 일을 하게 됐다.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치앙마이에서의 ‘역할놀이’도 이벤트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서의 시간은 그 전과는 다를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게 서로에게, 가족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온종일 네 식구가 붙어 있는 풍족하고 특별한 시간은 남편이 자의 반 타의 반 주부가 되어 일상을 끌고 나갈 수 있게 해주었고,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쉼 없이 메우던 나에게는 온전한 휴식을 주었다. ‘주부의 휴가’가 꿈결처럼 지나가서, 하루가 바삐 기울수록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아쉬움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또다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나에게 미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나는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장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남편의 일터가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밤을 새우며 일을 해내야 하는 한, 적어도 ‘주 52시간’이라도 지켜지기 전까지는 우리의 일상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머물렀다 떠나기를 반복하고, 가족이라는 이름표를 건채로 우리는 동그마니 남는다. “조금 헐겁고, 조금 맞지 않는 가운데, 그의 빈자리를 독자적으로 메워나가는 것을 새로운 결혼의 의미로 삼았다”는 나의 멘토 오소희처럼, 나는 또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에게 너그러워질 준비를 한다.

◇ 남편과 살며, 윤이를 보며, 연이를 생각하며

며칠 전,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가지를 꺼냈다. 밥 생각이 없다고 하던 남편이 어슬렁어슬렁 밥을 푸더니 식탁에 앉았다. 나는 몇 술 뜨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기 먹을래?” 하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식탁에 있는 반찬이면 된다고 했다.

그런 반응도 익숙하다는 듯 나는 말 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명절날 받아놓은 훈제 돼지고기를 꺼내어 썰었다. 먹음직스럽게 담긴 고기 접시를 식탁에 두며 “상추도 줄까?”라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편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이 나서 “쌈장이 좋아? 고추장이 좋아?”하고 나에게 물었다. 잠깐의 부산스러움이 지나간 뒤, 다시 마주 앉은 식탁은 풍성해져 있었다.

상추쌈을 먹으며 내가 말했다.

“같이 살면 삶의 질이 올라가는 거 같아. 혼자 있으면 대충 먹었을 텐데 자기가 있고 아이들이 있으니 나도 챙겨지네. 우리 서로에게 그런 사람들 아닐까? 삶을 돌보게 해주는 사람들.”

내가 꾸린 가정은 나에게 항상 균형을 묻는다. 식단의 균형뿐만 아니라 역할의 균형이나 시간의 균형 같은 것들을. 앞으로도 나는 수없이 냉장고 문을 열 것이다. 빨래를 돌리고, 남편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할 것이다. 그것이 시간으로 기록된다면 나의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스스로를 소진하는 ‘삶의 현장’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큼 자신을 위해 설계돼 있고, 또 어느 정도만 남을 위해 살도록 설계돼 있을까. 오롯한 나의 시간을 생각하다 보면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 남편이, 여자인 연이가, 남자인 윤이가 생각의 줄기를 타고 고구마처럼 달려 나온다. 그러니 누군가를 쉽게 탓할 수가 없다. 그저 ‘천국은 다른 곳에’ 있고, 일상이 이곳에 있을 뿐이다.

결혼이라는 일상은 어쩌면 자신밖에 몰랐던, 에너지 넘치는 ‘성장’의 시간을 끝내는 것이다. 나의 경계와 범위를 넓혀나가는 ‘성숙’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것. 소녀에서 엄마로, 여자에서 어른으로 나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나에게만 머물러 있던 한정적인 시야는 남편의 고단함을 훑으며 아이들의 삶의 균형으로까지 나아간다. 지켜보고, 지켜주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게 분명한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타협의 선을, 공존의 방식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결혼은, 또 육아는, 나를 너그럽게 만든다. 그 너그러움이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든다. 독자적이게 한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느 다정한 부부. ⓒ신은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느 다정한 부부. ⓒ신은률

“얘들아, 아빠 출근하신다~”

요즘 남편은 늦게 출근하는 대신 늦게 퇴근한다. 다행히 아이들이 방학 중이라 아빠를 배웅하며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남편이 현관으로 향하면 나는 아이들을 향해 주문을 건다. “공부는 잘해도, 못해도 되는 것이지만 인사는 항상 잘해야 하는 거야~” 놀다 불려온 연이와 윤이는 흥이 남아 현관 앞에서 제멋대로 까분다.

우리는 줄을 서서 차례로 일상을 표현한다. 짧고 긴, 때로는 장난스러운 포옹이 끝나면 아이들은 토끼처럼 제자리로 돌아간다. 남편이 “애들이 나중에 뭐라고 할까?” 하며 웃는다. “엄마아빠 또 저러네~ 하겠지” 하고 나도 웃는다. 남편은 반쯤은 진담이고 반쯤은 농담으로, “늦어~ 기다리지 마” 하고 현관문 밖에 선다. “오케이” 하고 털털하게 말하지만 누구보다 그가 무사히, 가능하면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현관문이 닫히면 그는,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설 것이다. 현관문이 닫히면 나는, 갈 사람이 떠나야 비로소 오는 후련함을 느끼고 큰 숨을 들이쉴 것이다. 그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한 바깥일을, 집안일을, 육아를, 공평하게 나누는 건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공평한 시간’이 간과하는 건 분명하다. 결혼 생활의 균형은 결코 시간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 애초에 꿈꿨던 결혼과는 사뭇 다르더라도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한, 그 달라진 모습을 보듬는 법을 터득해 가야 한다. 그게 결혼이라는 ‘DIY(DO IT YOURSELF) 키트’의 사용법 아닐까. 다시, 일상이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글을 쓰며 '가정의 주인(主婦)'으로 살고 있다. 여덟 살 연이, 여섯 살 윤이를 키운다. 일 년의 절반은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남편에게 육아를 가르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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