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으로 낳고 사회가 보호한다’ 독일의 익명출산제
‘익명으로 낳고 사회가 보호한다’ 독일의 익명출산제
  • 기고=손솔
  • 승인 2019.03.07 1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엄마민중당 특별기고②] 손솔 민중당 인권위원장

여성·엄마민중당은 지난달 10일부터 18일까지 독일과 프랑스에서 여성정책연수를 진행했다. 독일의 연방정치교육청과 임신갈등상담소, 프랑스의 여성권익부 등을 둘러보고 온 이들의 연속 특별기고를 통해 지금 한국의 여성과 엄마들에게 필요한 정책과 제도는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 편집자 말

독일 베를린의 ‘프로 파밀리아(pro familia)’ 상담소를 방문해 간담회를 진행했다 ©손솔
독일 베를린의 ‘프로 파밀리아(pro familia)’ 상담소를 방문해 간담회를 진행했다 ©손솔

지난달 14일 민중당 여성정책연수 일정 중 하나로 독일 베를린의 ‘프로 파밀리아(pro familia)’ 상담소를 방문했다.

‘임신갈등 상담소’로 지정돼 있는 이 상담소는 임신갈등에 대한 상담뿐 아니라 가족계획, 성생활 전반에 대한 상담과 성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 전역에는 프로 파밀리아 상담소 162곳이 운영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베를린의 상담소는 1964년에 설립됐다.

상담소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주황색 톤으로 인테리어 돼 있었고 교육프로그램이나 간담회를 진행할 만한 크기의 방, 내담자와 상담사가 1:1 상담을 할 때 알맞을 방부터 4~5명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크기의 방까지 다양한 공간들이 상담소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를 맞이해준 페트르 빈클러(Petr Winkler) 씨는 성교육학 전문 상담사로 31년간 근무했다며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다며 간담회를 시작했다. 상담소에서는 임신과 가족계획에 대한 상담, 피임에 대한 상담, 성생활에 대한 상담 그리고 성교육에 대한 지원 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상담소 운영의 기본 방침은 모든 사람이 자기결정권을 주도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거예요.”

나이, 성별, 직업, 정치적 성향, 성정체성과 상관없이 평등하게 상담을 진행한다. 신분 확인상 필요한 것 이외에는 절차상 확인하는 것은 없으며, 그저 상담을 해야 할 상황이 있을 뿐이다. 성생활에 대한 상담에서 성소수자 성생활에 대한 상담도 특별할 것 없이 진행된다.

또한 장애인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1층에도 상담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본 상담소는 4층에 있었다.) 1층의 상담소는 접수만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에서부터 피임약의 처방까지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도록 세팅돼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은 표명하는 것을 넘어 자기결정권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섬세한 부분에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베를린 프로 파밀리아 상담소 내부의 상담 공간 ©손솔
베를린 프로 파밀리아 상담소 내부의 상담 공간 ©손솔

◇ 낙태는 범죄라는 한국, 임신중단 상담 제공하는 독일

“출산과 임신중단, 양육과 입양 사이의 갈등을 상담합니다.”

독일사회는 임신중단은 선택이자 권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단어 자체로 그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다. 이에 여성의 결정권을 내포하는 단어로서 ‘임신중단’을 사용하고자 한다. 다만, 인용 또는 표현상의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낙태’를 사용했다.)

독일에서는 27년 전인 1992년에 ‘임신갈등 회피와 극복을 위한 법률(임신갈등법)’이 제정됐고 2013년에 일부개정해 시행 중이다. 이미 상담조건부 낙태 허용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룬 상황에서 상담을 보다 전면적이고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면 무분별한 낙태가 증가할 것이다, 생명을 경시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들이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세계보건기구 등의 국제 비교에서 낙태 허용 국가의 낙태율이 금지국보다 낮게 나타났으며, 루마니아의 경우 낙태금지법 도입 후 모성사망률이 일곱 배나 급증했다가 낙태를 허용한 이후 급락했다.)

낙태는 범죄이고, 낙태를 고민하는 것이 부도덕한 일이고, 임신하면 무조건 출산해야 한다는 사고(모든 것은 여성이 감당하게 되지만)가 여전히 있으니 말이다. ‘그런 비도덕적인 일을 상담해준다고?’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임신중단을 논의하는 데 있어, 여성의 경험과 여성이 겪는 갈등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우리 사회에서는 낙태를 고민하고 결정하고, 수술과 이후에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까지 모든 경험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담아둘 수밖에 없다.

수많은 고통과 침묵을 강요받을 때 임신중단과 관련된 모든 논의는 ‘낙태율’이 얼마나 된다는 등의 통계로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통계 숫자에 가려진 임신중단의 과정과 여성이 느끼는 감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신갈등’이라는 말은 비가시화 돼온 여성의 갈등과 고통을 실체로 인정하는 말이다. 낙태의 경험, 낙태의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정신적 고통, 낙인에 대한 두려움…. 낙태 결정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나라에 ‘임신갈등’이라는 말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않을까. 

독일 전역에는 프로 파밀리아 상담소 162곳이 운영되고 있다. ©손솔
독일 전역에는 프로 파밀리아 상담소 162곳이 운영되고 있다 ©손솔

◇ 독일, 2013년 신뢰출산법 제정으로 ‘익명출산’ 보장

“신뢰출산(익명출산)을 상담하고 지원하고 있어요.”

독일은 2013년 ‘임신여성의 지원확대 및 신뢰출산에 관한 법률(신뢰출산법)’을 제정했다. ‘신뢰출산’은 임신갈등상담소에서 익명으로 상담을 받고 익명으로 출산할 것을 결정한 예비 엄마가 적절한 의료처치를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안전하게 출산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익명출산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된 것이다.

익명출산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영유아 살해를 막기 위해 도입된 방도이기도 하다. 익명출산을 고민하고 결심한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고, 합법적인 의료 지원 하에 익명출산을 지원하고 있다.

신뢰출산제도가 우리나라의 ‘베이비 박스’와 유사한 ‘베이비 클라페’보다도 인도적으로 여기진다고 한다. 의료적 지원이 가능하니 여성의 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대처가 가능하며, 임신기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며 태아를 위한 편지와 사진 등을 함께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뢰출산제도는 아동의 혈통을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혈통증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절차를 두고 있다. 베이비 클라페의 경우 아동이 친생부, 친생모와의 연결지점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다른 점이다.

내담자가 상담과정에서 신뢰출산(익명출산)을 결정하면 이후의 과정은 모두 상담소를 비롯한 관련 기관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개인의 부담을 상당 수준 덜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익명성의 보장은 물론 이후 절차의 진행은 별도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돼 출산을 위해 병원을 갔을 때도 이름, 나이 등에 대해 여성이 추가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신뢰출산제도는 사회적 영향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데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이 제도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작동된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

익명출산을 결정했을 때, 상담소 등 다양한 기관들에서 익명성을 보장하고 비밀을 유지할 것이라는 신뢰, 익명출산 이후 아동이 사회시스템을 통해 보호되고 입양될 것이라는 신뢰, 이러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익명출산이라는 결정이 권리로서 실제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과 절차를 만드는 것보다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여성의 임신결정권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여부 선고기일이 4월 11일로 예정돼 있다. 자료사진 ⓒ베이비뉴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여부 선고기일이 4월 11일로 예정돼 있다. 자료사진 ⓒ베이비뉴스

◇ 낙태죄 폐지와 그 이후의 사회를 상상해보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기로에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여부 선고기일이 4월 11일로 예정돼 있다.

최근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75.4%가 형법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등 많은 논의와 행동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낙태죄 처벌조항의 위헌여부에 대한 논의를 넘어 여성의 건강에 대한 권리, 재생산에 대한 권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다.

가족구성, 임신과 출산 그리고 임신중단까지 여성이 겪는 과정에 다양한 선택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독일 사회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해본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베사모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베이비뉴스는 창간 때부터 클린광고 정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언론으로서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뉴스는 앞으로도 기사 읽는데 불편한 광고는 싣지 않겠습니다.
베이비뉴스는 아이 낳고 기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대안언론입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에 동참해주세요. 여러분의 기사후원 참여는 아름다운 나비효과를 만들 것입니다.

베이비뉴스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베이비뉴스와 친구해요!

많이 본 베이비뉴스
실시간 댓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8 경찰공제회 자람빌딩 B1
  • 대표전화 : 02-3443-3346
  • 팩스 : 02-3443-3347
  • 맘스클래스문의 : 1599-0535
  • 이메일 : pr@ibabynews.com
  • 법인명: 베이컨(주)
  • 사업자등록번호 : ​211-88-48112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 01331
  • 등록(발행)일 : 2010-08-20
  • 발행·편집인 : 소장섭
  • 저작권자 ©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인정보보호 배상책임보험가입(10억원보상한도, 소프트웨어공제조합)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유미 실장
  • Copyright © 2024 베이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ibaby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