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X일 오늘의 일기, 날씨는 '미세먼지'"
"3월 X일 오늘의 일기, 날씨는 '미세먼지'"
  • 칼럼니스트 한희숙
  • 승인 2019.03.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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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한 장 육아일기 한 줄] 「나오니까 좋다」와 「청소부 토끼」

봄을 앞두고 미세먼지 수치가 날로 최고점을 찍던 어느 날, 오랜만에 밖에 나갔다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며칠째 집 안에만 있다가 밖에 나오니 공기가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은 찰나의 순간 사라졌지만 집안 공기도 바깥 못지않게 나빴을 것이다. 공기청정기를 가동하고 물걸레질에 신경 쓰고 음식 조리를 최소화하며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했지만 집안 공기질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요리할 때 실내공기가 어마어마하게 나빠진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 먹일 음식을 만들려면 가스불을 켜야만 했다. 조만간 나아진다는 예보가 없는데 계속해서 반조리식품과 배달음식만 아이에게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린아이의 숨과 밥, 무엇을 우선에 둬야 하나 슬픈 고민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요리에 손을 떼고 어떻게든 버텨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3월 신학기임에도 뚝심 있게 아이의 결석을 결단했던 엄마들처럼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지 말고 끼고 있어야 했는지도…. 최악의 미세먼지 앞에 엄마들은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은 똑같았을 것이다.

미세먼지가 걷힌 뒤 아이와 집 밖으로 나섰다. 마스크를 벗은 아이를 따라 동네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제 막 나뭇가지에 움트기 시작한 새싹을 관찰했다. 미세먼지를 뚫고 봄은 오고 있었다. 밖에 나오면 보이는 모든 게 관심거리인 아이는 어느 것 하나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아이가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기다렸다. 아파트 옆 산책로를 따라 동네도서관까지 걸었다.

여기저기 상점을 기웃거리며 주전부리도 사 먹었다. 깨끗해진 공기를 누려야 했으므로 밖에서 길게 시간을 보냈다. 다리는 아팠지만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나오니까 좋다”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좋지, 좋지?” 아이에게 거듭 물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아이는 이미 온몸으로 좋다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특별한 장소에 놀러온 것도 아니고 그저 문밖으로 나온 게 좋은 일이어야 한다는 현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제 막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한 아이는 일기장의 날씨를 표시하는 부분에서 주춤한다. “오늘 날씨는 뭐예요?” 오늘의 날씨는 다름 아닌 미세먼지 최악! 미세먼지 칸이 어디 있냐며 묻는 아이에게 오늘도 흐림을 나타내는 구름을 가리킨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도 되겠다'는 엄마 마음이 허락할 정도의 공기질이 어쩌다 이렇게 큰 소망이 된 걸까.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의 한 장면. ⓒ사계절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의 한 장면. ⓒ사계절

그림책 「나오니까 좋다」(김중식, 사계절, 2018)에는 숲으로 캠핑을 가자는 고릴라와 할 일이 있어 망설이다가 따라 나서는 고슴도치가 나온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고 음식 만들기며 캠핑 환경은 낯설고 불편했다. 하지만 하루를 꼬박 지내고 맞이한 아침, 고슴도치는 나오니까 좋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낀다.

“나오길 잘했지?” 고릴라가 묻는데 고슴도치는 들은 체 만 체 제 말만 한다. “안녕, 꽃! 안녕, 뱀! 좋은 아침이야. 안녕, 릴라야. 잘 잤어? 여기 너무 좋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고슴도치에게 이번 캠핑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연이 주는 에너지를 듬뿍 받았으니 고슴도치가 돌아가서 제 할 일을 더 잘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공포로 다가왔던 미세먼지가 잠시 물러나고 더욱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맑은 날에는 열 일 제쳐두고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숲 체험이나 캠핑도 좋고 집 근처 공원 나들이, 놀이터에 나가 숨차게 뛰는 것 모두 좋다. 야외활동하며 즐거웠던 경험을 아이가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림책의 고슴도치에게는 이번 캠핑이 어떤 전환점이 되는 특별한 경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에 누군가 나가자 제안하면 따라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 경험이 여러 번 축적되어야 아이에게 좋은 인상으로 확실하게 각인된다. 그래서 아이에게 야외활동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알려주고 싶은데 쉽지 않다. 놀 시간도 많이 없는데 막상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미세먼지가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장기전이라서 더 암울하다.

그림책 「청소부 토끼」의 한 장면. ⓒ한솔수북
그림책 「청소부 토끼」의 한 장면. ⓒ한솔수북
그림책 「청소부 토끼」의 한 장면. ⓒ한솔수북
그림책 「청소부 토끼」의 한 장면. ⓒ한솔수북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는 그림책 「청소부 토끼」(한호진, 한솔수북, 2010)에서 토끼들은 더러운 달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달을 청소하면 환한 달빛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러고는 달을 청소하겠다며 계속해서 달로 날아가려 시도한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달빛이 더럽게 보인 건 지구의 오염 때문이었으니 토끼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던 셈.

아이는 그림책 속 익살스러운 표정의 토끼 그림에 낄낄댔지만 나는 토끼들의 마지막 선택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달에 와 보니 여긴 아주 깨끗해요. 살기도 아주 좋아요.”

그리하여 토끼들이 오늘도 지구를 떠나고 있다는 결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달나라로 떠나는 토끼들처럼 미세먼지를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을 생각한다는 부모들도 있다. 하지만 이 땅에 발 딛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나 같은 부모들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채 고민은 반복되고 그사이 미세먼지는 자꾸만 찾아와 우리 삶을 갉아먹고 달아난다.

모처럼 맑은 날, 아이와 아파트 뒤로 난 긴 산책로를 걸었다. 임신 전 아이를 기다리며, 아이를 배 속에 품고 걷던 길이다. 계절마다 풍경이 좋아 아이가 태어나면 이곳에서 산책하자고 배 속 아기에게 줄곧 이야기했던 길이기도 하다. 올 봄에는 아이와 이 길에서 더 많이 이야기 나누며 걷고 싶다. 물론 마스크 없이.

*칼럼니스트 한희숙은 좋은 그림책을 아이가 알아봐 주지 못할 때 발을 동동 구르는 아기엄마이다. 수년간 편집자로 남의 글만 만지다가 운 좋게 자기 글을 쓰게 된 아기엄마이기도 하다. 되짚어 육아일기 쓰기 딱 좋은 나이, 일곱 살 장난꾸러기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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