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12시간 자동차 타기, 못 할 일 아니지만
아이들과 12시간 자동차 타기, 못 할 일 아니지만
  • 칼럼니스트 이은
  • 승인 2019.05.1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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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육아인류학] 순간이동 초능력이 절실하긴 했다

미국은 정말 넓다.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다가 장거리 여행을 할 일이 생기면 다시금 느낀다. 미국은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걸.

얼마 전 학회 차 다른 주(state)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마침 아이의 봄 방학과 그 일정이 겹쳤다. 미국의 많은 학교들은 봄 학기 중 보통 3월 말이나 4월 말에 일주일에서 열흘간의 짧은 방학을 갖는다.

엄마가 다른 도시에 가서 자고 온다니 잠들기 전에 꼭 엄마 냄새를 맡아야 하는 아이들이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단언(적어도 큰아이는)했다. 온 가족의 비행기 표를 끊자니 예산이 빠듯한 데다가 대도시간의 이동이 아니라 중소도시 사이의 구간이라 환승 일정도 애매했다. 우리는 결국 차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12시간 이상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긴장되기 시작했다. 집 이사가던 날 8시간 이상 이동하며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긴 거리를 자발적으로 이동하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12시간을 하루에 이동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해 중간에 숙소를 잡아 이틀로 나누어 이동하기로 했다.

어찌어찌 학회 발표문을 완성한 뒤 아이들용 여벌 옷과 비상식량, 간식, 큰아이가 읽을 책과 가지고 놀 필기구, 미술도구, 상비약 등을 챙겼다. 태블릿 피씨에는 영화 파일을 채워두고 물티슈와 티슈, 생수도 가득 챙겼다.

출발하고 첫 몇시간은 나름 평화로웠다. 노랫소리에 맞춰 몸도 두둠칫, 두 눈도 반짝. 아이들은 별다를 것 없는 나무와 풀만으로 가득한 바깥 풍경에도 즐거워 보였다. 공부하는 엄마 탓에 거의 집에만 갇혀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중간 중간 휴게소에서 잠시 화장실에 가고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도 아직은 평화로웠다.

미국의 고속도록 휴게소는 보통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거나, 화장실 앞 로비에 초콜릿이나 씨리얼바, 음료수가 들어있는 자판기만 한두개 있을 뿐이다. 한국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쿵짝쿵짝 트롯트 메들리도 없고 알감자도 없고 쥐포나 우동, 소시지나 커피도 없다. 때문에 휴게소에 내려봤자 아이들도 부모들도 화장실에 다녀온 뒤 바깥 공기와 초록색 나무 향기를 맡고는 금방 차에 다시 오른다.

"엄마! 학회 발표문은 내가 써줄게요!" 야무진 둘째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춤 춘다. ⓒ이은
"엄마! 학회 발표문은 내가 써줄게요!" 야무진 둘째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춤 춘다. ⓒ이은

그렇게 달린지 세 시간쯤 지나자 결국 순둥이 둘째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아니야~아니야~!”

목청 좋은 그녀는 나중에 성악에 재능을 보일 것만 같다. 뭐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아닌 듯 그녀의 표정은 심히 불만족스러워 보인다. 안타까운 엄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개그맨 공채 시험이라도 준비하듯 얼굴 연기와 몸 개그를 선보이며 아이를 웃겨보려 노력한다.

그래도 아이는 “아니야, 아니야! 아빠! 아빠!”하고 외친다. 운전 중인 아빠가 안 보이니 더 화가 난 상태다. 그때 만화책만 보며 관심 없어 보이던 오빠가 “동생아~ 까꿍” 해주니까 울다 말고 웃는다. 엄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빠가 놀아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아무렇지도 않다. 엄마는 민망해져 창밖만 내다본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고맙게도 둘째아이는 잠에 빠져들었는데 이번에는 큰아이가 몸을 비비 꼬기 시작한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짜증이 섞인 큰애의 물음에 나는 한국마트에서 사 두었던 한국 과자를 꺼내 줬다. 동생이 잠든 시간은 과자 간식 먹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다.

큰아이는 순식간에 과자를 먹고는 엄마 아빠랑 끝말잇기 놀이를 시작한다. 한국어 단어를 잊지 않으려 차 안에서 자주 하는 놀이다. ‘름’이나 ‘늠’같은 글자도 ‘음’으로 바꿔주지 않는 우리만의 규칙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큰아이에게 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처음 아이의 '라듐' 공격에 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위인전을 읽어준 것을 후회했다. 야속한 퀴리부인이여.

순둥이인 작은아이는 밤에 잠을 안 잘까 봐 살짝 고민이 될 정도로 단잠에 빠져들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여러 개의 공갈 젖꼭지와 엄마의 저질 연기력을 선보일 손가락 인형,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운드북과 작은 스케치북 등은 꺼내볼 필요도 없었다.

다만 큰아이의 몸 비비 꼬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답답할까, 어른인 나도 세시간이 지나자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태블릿 피씨에 새로 담아둔 영상 중에 하나를 틀어준다. 아이는 즐겁다. 동생이 깰까봐 "크흐흐" 하고 웃다가는 입을 틀어막고는 큭큭 거린다.

큰아이가 영상을 보는 동안 나는 얼른 영상이 끝날 때를 대비해 오목을 둘 오목판을 만들고 아이가 재미로 풀 수 있는 난센스 퀴즈 같은 것을 미리 몇가지 적어둔다.

예컨대, 'What kind of witch lives on the beach?(모래사장에 살고 있는 마녀를 뭐라고 하나요?)'질문에 대한 답으로 'A sandwich(샌드위치-모래를 영어로 샌드, 마녀를 영어로 위치라고 하므로-)' 같은, 오글거리지만 아이의 반응만큼은 제일 뜨거운 종류의 문제들 말이다.

하, 집엔 또 어떻게 가나. ⓒ베이비뉴스
하, 집엔 또 어떻게 가나. ⓒ베이비뉴스

아이와 장거리 여행은 스트레스도, 걱정도 많지만 준비만 철저하게 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힘들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와 5시간 이상의 장거리 자동차 이동을 많이 해본 그동안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4세 이상의 아이들에게는 각종 놀이거리와 말놀이를 많이 준비해주고 영유아일 경우에는 컨디션 조절을 최우선으로 해주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영유아에게는 얇은 옷을 여러 겹 입혀서 때에 맞춰 체온도 조절해주고, 부모가 자주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주며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소에 좋아하는 장난감과 먹거리를 자주 챙겨주고 급하게 가려는 생각말고 자주 쉬면서 기저귀도 갈아주고 팔다리도 한번씩 쭉쭉 펼 수 있도록 마사지 해주는 것도 좋다.

아이들과 함께 간 이번 학회는 박사과정 학생의 입장에선 조금 부담되는 일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남편의 외조 덕에 엄마로서 또 다른 추억이 생긴,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집엔 또 어떻게 가나… 초능력을 한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무조건 순간이동으로 택하겠다고 다짐하는 엄마였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서 큰아이를 키웠고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좋은 엄마인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으로 이미 성장해 가는 중이라고 믿는 낙천적인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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