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사로잡은 '상상 친구',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아이 사로잡은 '상상 친구',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 칼럼니스트 한희숙
  • 승인 2019.05.1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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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한 장, 육아일기 한 줄] 그림책 「알도」

아이가 여섯 살 무렵 친한 친구가 한 명 생겼다. 친구 이름은 ‘재훈’이라고 했다. 아이는 이따금 그 친구와 뭐를 했다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놨다. 어린이집에 그런 이름의 친구는 없었던 것 같지만 착각이려니 처음에는 가볍게 넘겼다. 

아이는 날이 갈수록 그 친구와의 일을 자주 꺼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공룡 장난감 중 그 친구가 갖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 친구가 어디를 가봤으며 무엇을 잘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이제 우리의 대화 속에 그 친구는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사실 아이가 그 친구 이야기를 할 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말끝마다 “진짜야"라는 말을 덧붙인다는 것이었다. 제 딴에는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철석같이 믿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이의 그 말은 내 의심을 풀어주는 단서가 되었다. 알고 보니 재훈이는 우리 아이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친구였다.

어느 날인가 아이는 자신이 재훈이 집에 가봤으며 그 친구의 가족들과 어디를 다녀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아이에게 재훈이가 네 상상 친구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아니라며 펄쩍 뛰던 아이는 내가 재차 묻자 꾸며낸 이야기였음을 털어놓았다.

모든 것이 명백하게 밝혀진 순간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만 이 나이 또래의 상상력 풍부한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일단은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이가 상상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 진지하게 들어주되 “아, 네 상상 친구 이야기구나” 하면서 현실과 선을 그어주기로 했다.

혹여 친구들 앞에서 상상 친구 이야기를 꺼내 아이가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곤란해질 테니까. 만 5세, 친구관계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시기인 만큼 아이가 친구들과 원만하게 보내기를 바라는 엄마 마음이었다.

◇ 아이의 '상상'에 맞장구치니 대화가 더욱 풍성해졌다 

아이는 별다른 일 없이 상상 친구와 함께 잘 지냈다. 상상 친구와 이야기한다고 혼잣말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내가 아이의 모든 순간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어린이집은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가 없다. 어쩌면 엄마의 지나친 걱정이 아이에게 없는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아이의 행동 하나를 문제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아이는 스스로 성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아이를 믿고 지켜보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얻었다.

엄마가 자신의 상상 친구를 받아들이자 아이는 이야기를 마음껏 지어내 들려줬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보거나 들은 것,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보태고 바꿔서 이야기를 만드는 듯했다. 그렇게 아이와의 상상 놀이는 오래 계속되었다. 어린아이가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치부해 버렸다면 나는 아이와의 추억 하나를 놓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둘 다 상상 친구를 통해 더 풍성하게 이야기 시간을 즐겼음은 분명하다.

일곱 살이 된 아이는 더 이상 상상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유치원 친구 이야기를 늘어놓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는 지금 유치원에서 새로 알게 된 여자친구 한 명에게 푹 빠져 있다. 덕분에 아이의 유치원 생활에 활기가 넘치게 되었고 아이도 더욱 명랑해졌다.

상상 친구와 놀던 녀석이 어느덧 여자친구 때문에 가슴 설레어 하고 있다니… 아이의 여자친구에게 우선순위는 빼앗겼지만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흐뭇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 아이는 어떤 이유로 상상 친구를 생각해낸 걸까. 그맘때 자연스러운 아이들 모습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다른 이유로 마음속에 상상 친구를 만들어낸 거라면?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시공주니어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시공주니어

그림책 「알도」(존 버닝햄, 시공주니어, 2017) 속 주인공 여자아이에게도 상상 친구가 있다. 이름은 ‘알도’다. 아이가 알도를 만들어낸 건 외로움 때문이다. 아이는 그림책 첫 장부터 이야기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텔레비전을 포함해 장난감이랑 책, 갖고 놀 것이 많이 있지만 그런 사물들이 아이의 외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부모는 바쁘고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 심지어 아이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러니 아이가 마음 붙일 수 있는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마음속에 상상 친구를 만들어낸 거라니 마음이 불편하다. 다행인 점은 아이가 상상 친구 '알도'를 통해 위안을 얻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부모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데도 아이가 그 상황을 버텨내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타깝다. 물론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린 소녀에게 유년 시절, '알도'와 보낸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그림책 말미에 아이의 긍정적인 성장을 암시해줘서 반갑다. 이제 아이는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함께 있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알도를 까맣게 잊고 지내는 날도 있겠지만, 나에게 정말 힘든 일이 생기면… 알도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누군가 나를 든든하게 지원해 준다는 믿음은 아이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도 상상 친구가 이런 존재로 남아주면 좋겠다.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기대하며 그림책 「알도」를 읽어줬다. 그런데 아이 반응이 심드렁하다. 요새는 왜 상상 친구, 재훈이 이야기를 안 하니, 물어보니 멋쩍게 웃기만 한다. 어린 시절 상상 친구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막상 아이가 다 잊었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 좀 컸다고 짜장면도 안 묻히고, 상상 친구도 잊고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짜장면을 먹는데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왜 입에 짜장 안 묻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아이 얼굴을 쳐다보니 아이 입에 짜장 소스가 전과 달리 덜 묻어 있었다.

아이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구나 싶고 언제 이렇게 컸나 아쉬운 감정만 커졌다. 그래서 “엄마는 네가 많이 묻히는 게 좋아”라고 답했고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아이가 빨리 크길 바랐으면서 아이가 쑥 자라니 아쉬운 마음이란.

하루는 아이가 “엄마가 날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서 주는 거야”라며 색종이로 무언가 만들어 손에 쥐어줬다. 눈물이 찔끔 터지고 감정이 차오르는 것도 잠시, 금세 말 안 듣는 아이 때문에 신경질이 팍 났다.

그렇게 오늘도 흘러가면 잡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아이와 나는 우당탕탕 지내고 있다. 아이는 쑥쑥 자라고 있다.

*칼럼니스트 한희숙은 좋은 그림책을 아이가 알아봐 주지 못할 때 발을 동동 구르는 아기엄마이다. 수년간 편집자로 남의 글만 만지다가 운 좋게 자기 글을 쓰게 된 아기엄마이기도 하다. 되짚어 육아일기 쓰기 딱 좋은 나이, 일곱 살 장난꾸러기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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