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옛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 칼럼니스트 강백수
  • 승인 2014.05.12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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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다시 친구가 되다

[연재] 강백수 에세이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하지'

 

2005년의 나에게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이야기를 해준다면 아마 울며불며 멱살을 잡는 스무 살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스무 살 새내기 시절의 설레던 연애가 끝나고 8년이 지난 2013년의 가을, 나는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그녀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학과 동기였던 그녀와 나는 새내기시절 겨우 5개월을 사귀었다. 스무 살 남자애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의 연애는 서툴렀다. 관심을 가져 줘야 했을 때 무심했고, 잠시 놓아주어야 했을 때 집착했으니. 헤어진 연인이 된 우리가 다시 친구가 되기까지는 약 일 년 반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보다 더 필요했던 건 서로의 새로운 연애. 각자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서야 우리는 연애가 시작되기 이전의 친구 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는 그녀를 봐도 자존심 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번씩 전화통화도 하고, 또 어쩌다 한 번씩은 만나서 밥도 먹는 사이가 된 것이다.

 

‘나랑 사귄 적이 있는 친구’는 내게 그녀 하나뿐이었다. 다른 이성친구들과는 다른 주제의 대화가 가능해서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연애가 서툴렀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현재의 연애 문제에 대한 상담도 해 줄 수 있었고, 가끔은 서로 조금 다른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던 그 시절의 기억을 각자 꺼내어 비교하기도 했다.

 

그녀는 꽤 괜찮은 연봉을 받는 은행원이 되었다. 나는 글을 쓰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괜한 열등감에 가끔 들리는 그녀의 소식과 일 년에 두어 번쯤 걸려오는 전화가 불편하다가 최근에야 밥 먹는데 큰 곤란이 없을 정도가 되어 다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는 그녀의 부탁으로 적금 통장도 만들었다. 우편으로 전해 받은 적금통장에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낯익은 필체가 반갑기도 하고, 그 시절 강의실에서 주고받던 쪽지가 생각나 살짝 두근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공연장 대기실에서 그녀의 메시지를 받았다. -민구야, 너의 첫사랑은 결혼을 한단다, 호호호- 장난스런 메시지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우리가 친구이지만 옛 여자 친구가 결혼을 하는 건 처음이니까. -첫사랑 아니거든 인마- 라고 답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서 사랑 노래를 부를 때 특별히 어떤 여자를 떠올리며 부르지는 않지만, 그 날 만큼은 스무 살의 그녀를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몇 달 새 공연 중 최고의 라이브였던 것 같다.

 

괜히 민망해서 그녀를 축하해주러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참석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슬럼프 탓이었다. 1집 앨범 이후로 그럴싸한 노래가 안 나오고 있을 때라서, 혹시 그녀의 결혼식에 다녀오면 윤종신의 ‘너의 결혼식’과 같은 희대의 발라드를 하나 쓰게 될까 하는 마음이었다. 축의금은 5만 원을 냈다가, 괜한 자존심에 봉투를 다시 받아 5만 원을 더 넣었다.

 

그녀는 어깨선이 예뻐서 웨딩드레스가 역시나 잘 어울렸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 녀석들은 조금 늙어있었고, 나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서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윤종신 노래 같은 발라드는 나올 리가 없었다. 신랑 입장, 신부 입장, 신랑 신부 행진 때 진심어린 축하를 담아 박수를 치고, 지루한 주례사 동안에는 동기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그래도 차마 하객 사진에는 등장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해고 있었는데, 8년 전 우리의 일을 잊어버린 동기들의 손짓에 나도 모르게 단에 올라가 속도 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놀라 흠칫 하기는 했지만, 신랑 신부의 입맞춤을 보면서도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모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결혼을 한 그녀도 잘 되었고, 그걸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된 나도 잘 되었고, 그 시절 헤어지고 좋은 사람들을 또 만나고 또 헤어지며 웃고 울던 내 모습들도 다 잘 되어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의 시작과 끝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잘 알게 되어 상처를 잘 받지 않게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애처로울 정도로 울던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었나 싶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그렇게 잘 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강백수는 2008년 등단한 시인이자 2010년 데뷔한 싱어송라이터이다. 2013년 정규 1집 앨범 <서툰 말>을 발매하였고, 2014년 산문집 <서툰 말>을 출간하였다. 그에게 사랑이란 말은 아직 어렵고, 결혼이란 말은 아직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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