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시작, 그 주관적 기준에 대하여
연애의 시작, 그 주관적 기준에 대하여
  • 칼럼니스트 강백수
  • 승인 2014.06.2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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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썸’이고 어디부터가 ‘연애’인 걸까

[연재] 강백수 에세이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하지'

 

“우리 사귀자”와 같은 고백 없이도 연애가 진행될 수 있다는 걸 안 건 최근의 일이다.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구두 합의 없이 ‘자연스레’ 사귀고 있더라는 커플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많은 수수께끼가 해소되었다. 이를테면, 애인도 아니면서 나의 사생활을 통제하려 들던 어떤 ‘썸녀’에 대한 의문.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자주 밥을 먹었고 영화를 봤고, 하루 종일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들었던 “여자 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에 나는 한 번도 그렇다고 한 적이 없었다. 여자 친구가 없다고 하면서도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나와 사귀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연인으로서의 의무 같은 걸 나에게 지우려고 했다.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그 의무들이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왜 내가 누구랑 술을 마시는지 알려고 드는지, 왜 그게 친한 여자애인 날에는 토라지고 마는지, 왜 내가 주말을 반드시 그녀와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와 같은 의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점차적으로 줄였다. 우리의 관계를 연인사이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관계는 연애가 되지 못했던 수많은 설렘들 중 하나가 되어 흐지부지 사라졌다.

 

끝나버린 관계는 으레 술자리 대화의 주된 이슈가 되기 마련. 그녀 얘기를 친구에게 들려줬을 때 친구는 말했다. “야, 걔는 너희가 사귀는 줄 알았을 걸?” “말도 안 돼, 난 걔한테 사귀자고 말한 적 없는데?” “말만 안했지 그게 사귀는 거랑 뭐가 달라? 손잡고 키스까지 해 놓고 아니라고 발뺌하는 네가 나쁜 놈 같은데?”

 

사실 우리는 자주 밥을 먹었고 영화를 봤고, 하루 종일 메시지를 주고받았을 뿐 만 아니라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곤 했다. 관계의 시작이 술 먹고 충동적으로 나누었던 키스였으니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그녀와 나는 연애의 시작에 대한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말들이 오가지 않았다면 연인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내 기준이다. 키스를 하고 만약에 섹스를 했다 하더라도 내 기준으로는 그건 연애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준 안에서는 하루 종일 연락을 하고 키스를 하는 우리는 이미 연인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연애라는 것은 인간이 ‘발명’한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 기준에 대한 합의를 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저기, 우리 지금 사귀고 있는 건가?” 라는 질문을 그녀가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렇게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더라면 우리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 그녀가 ‘주제 넘는 여자’가 되거나 그녀에게 내가 ‘개자식’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연애의 시작만 그런가. 누군가는 끝났다고 생각한 연애가 누군가에게는 끝나지 않은 연애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니까 연애를 발명했고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관계를 꾸려가기에 이러한 애매성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다. 먼 옛날의 누군가도 우리 스스로의 애매성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고, 그에 대한 개선책으로 탄생한 것이 ‘대화’가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그래, 애매할 때는 까놓고 대화를 했어야 했는데.

 

*강백수는 2008년 등단한 시인이자 2010년 데뷔한 싱어송라이터이다. 2013년 정규 1집 앨범 <서툰 말>을 발매하였고, 2014년 산문집 <서툰 말>을 출간하였다. 그에게 사랑이란 말은 아직 어렵고, 결혼이란 말은 아직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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