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 훈육도 아닌 그저 보여주기"... 부모의 역할이란?
"교육도, 훈육도 아닌 그저 보여주기"... 부모의 역할이란?
  • 칼럼니스트 신은률
  • 승인 2018.04.2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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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의 일곱살 인생] 보여주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이 아저씨 누구야?”  

택배를 풀어 안에 있던 책을 살펴보고 있으니 옆에서 연이가 묻는다. 웬 긴 머리의 남자가 있나 싶어 신기한 모양이다. 아직까지 연이의 세계에서 남자는 머리를 묶는 것도, 귀고리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아빠나 할아버지처럼 짧은 머리에 턱수염이 난 모습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왜 저 아저씨는 머리가 길어?”, “왜 여자같이 화장을 했어?” 등의 질문들이 별똥별처럼 쏟아진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운 나이, 하얀 머리에 ‘파마’를 한 것 같은 사진 속 아저씨가 궁금할 수밖에.

“어, 장 자크 루소야!”

“자앙 자까 루쏘오?”

친구가 선물해 준 ‘에밀’이라는 책을, 마침 연이와 함께 있을 때 택배 아저씨가 전해주었고, 그걸 잠시 보고 있던 중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육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시크하게 대답을 해주고 연이의 표정을 살핀다. 어느 시험, 국어 지문이나 사회 지문에서 ‘이 아저씨’를 반드시(!) 만나게 되리란 걸 지금 연이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생소한 이름에 호기심이 생기는지 연이가 “장 자크 루쏘오...” 하고 몇 번을 더 웅얼거린다.

장 자크 루소가 쓴, 에밀. 에밀이라는 가상의 소년을 키우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은률
장 자크 루소가 쓴, 에밀. 에밀이라는 가상의 소년을 키우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은률

연이가 루소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나는 몰래 연이의 무의식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이왕이면 어딘가에 ‘지금’이 콕 박혀버리기를 바라면서. 단순히 시험에 나올 위인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 학교에서 그에 대해 배우게 될 때, 오래된 기억 속에서 ‘에밀’의 책장을 넘기던 엄마가 떠오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느새, 봄날의 개구리처럼 폴짝거리며 저만치 가버리는 연이. 연이에게 젊은 시절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퍽 궁금해진다.

◇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들

며칠 전, 유치원에서 돌아온 연이가 “엄마들은 왜 회사에 안 다녀”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이라니. 그러고 보니 연이가 자주 어울리는 동네 친구의 엄마들은 대부분 전업주부다. 치과에서 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고 그만 둔 엄마, 둘째를 임신하고서도 열심히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엄마, 나처럼 육아를 독박으로 맡아버린 엄마, 아이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발적 전업주부까지. 집에 있어도 엄마의 모습은 여러 가지인데 각자의 사연을 알 길이 없는 연이는 보이는 대로 ‘엄마=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등식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이모도 엄마인데 회사 다니잖아. 그리고 엄마도 일 해. 글 쓰고 있지, 그치?”

연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내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연이의 몫이다.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는 옛말이 깊숙이 와닿는 순간. ‘일견(一見)’은 유명한 관광지나 역사적인 공간에 가서 마음먹고 보여줄 때가 아니라 어쩌면 일상 속에서 내내 유용한 말인 것이다. 특별히 부모에게는 ‘일견(一見)’보다 ‘일견(日見)’이 더 적확할지도 모른다. 매일매일의 모습을 겹겹이 쌓으면서 우리는 서로를 만들어가고 있으므로.

◇ ‘일상이라는 이름의 모험’을 선택한 교토의 어느 부부 이야기

임경선의 에세이 「교토에 다녀왔습니다」에는 함께 일하는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교토에서 ‘와이프 앤 허즈번드’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이 부부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확 줄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열고, 일주일에 3번은 쉬면서 가족과 함께 보낸다. 카페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올라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인 동시에, 아빠이자 엄마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이 가게를 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가급적 아이들 곁에서 지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이들이, 저희가 일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자양분이 되어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참 기쁘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뒷모습만 보이는 게 아니라 얼굴을 마주보는 시간도 소중히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리게 되었지만 저희의 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p.59)

엄마가 되고 보니, 부모란 정말로 프로의식이 필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훗날 부모에게 존경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긴 세월을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임경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상이라는 이름의 모험’ 속에서 바른 것을 묻고 좇으며 살아온 그 모습에 대한 경의. 아마도 교토 부부의 아들과 딸은, 일을 줄이기로 한 부모의 선택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배울 것이다. 부부가 애써 만든 ‘마주보는 시간’ 동안 아이들은 부모의 그림자를 밟으며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겠지. 그로부터 삶의 경중을 가늠하게 되겠지. 긴 말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칼럼 쓰는 엄마 옆에서 엄마 따라하는 연이. ⓒ신은률
칼럼 쓰는 엄마 옆에서 엄마 따라하는 연이. ⓒ신은률

◇ 일상 속에서 나는 어떤 엄마이고 싶은가

지난 주말, 둘째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있는데 연이가 불쑥 끼어든다. “엄마는 왜 글쓰기가 좋아?” 질문을 받고 보니 너무나 원했던 거다. 이것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진다. 평소에도 거실이 바라보이는 식탁에 앉아 두 녀석이 노는 걸 보며 틈틈이 글을 써왔다. 내가 글을 쓰고 있으면 노트북 주변을 서성이다 자판을 하나씩 눌러보는 게 연이의 일이다. 그러다 연이는 내 모습을 복사한듯이 옆에 앉는다. 그렇게 교육도, 훈육도 아닌 그저 보여주기로 일상의 한 조각을 만들어본다. ‘내가 먹는 게 나를 만든다’는 어느 책의 글귀처럼 내가 애써 보여주는 일이 나를 만드는 것일테다. 내 모습을 보며 연이가 무엇을 꿈꿀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다만 고요히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 젊은 엄마로 연이의 기억에 남는다면 참 좋겠다.

*칼럼니스트 신은률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배웠다. 일 년에 절반은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드라마PD의 아내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믿으며 7살, 5살 남매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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