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너무 더워서 물놀이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놀이터에도 갈 수 없다. 그나마 실내인 키즈카페, 블록방엔 아이와 어른들로 가득하다. 이마저도 한두 시간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서늘한 곳으로 피신할 방법을 궁리하던 우리 가족은 동네 아담한 극장을 떠올렸다. 달콤한 캐러멜 팝콘과 시원한 음료가 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요구와 질문 공세에서도 해방될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는 바로 온 가족이 슈퍼히어로인 ‘인크레더블2’다.
역삼각형 몸매에 강력한 힘을 가진 아빠 'Mr. 인크레더블', 상상 그 이상으로 유연한 몸을 가진 엄마 '일라스티걸', 투명인간이 되고 자기장으로 방어막을 만드는 첫째 바이올렛, 엄청난 스피드로 물 위를 달릴 수도 있는 둘째 대쉬, 아직 젖병을 물고 있는 아기지만, 변신, 순간이동, 레이저 발사 등 다양한 초능력을 가진 막내 잭잭. 이렇게 슈퍼파워를 가진 가족이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혼을 다해 영화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악당과 슈퍼히어로의 과도하게 경쾌한 격투 장면을 기대했던 아내는 다소 실망했고, Mr. 인크레더블을 동경했던 나는 그의 육아 모습에 좌절했다.
6개월 전만 해도 나는 육아휴직을 하고서 아이들과 일상을 함께 나누는 주부였다. 아이들을 깨워서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등원시킨 후 집안일을 하고 나면 훌쩍 하원할 시간. 잠시 놀이터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씻기면 곧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식사 후 설거지를 할 때면 “아빠, 같이 책 읽자. 아빠, 함께 놀자.”라고 하는 아이들의 요구를 모른 척하기 일쑤였다. 어둠이 짙어지고 곤하게 잠든 아이들을 보면, ‘내가 Mr. 인크레더블처럼 엄청난 체력을 갖고 있다면 너희들과 더 즐거울 텐데…’ 하며 미안해했다.
마침 '인크레더블2'에서도 육아 장면이 나온다. Mr. 인크레더블은 열심히 일하는 일라스티걸 덕에 고귀한 육아의 기회를 얻게 된다. 아내 없이도 완벽히 해내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얼굴은 물론 몸과 마음이 온통 다크서클로 변하게 된다. 사춘기 바이올렛의 데이트를 일그러뜨리고, 대쉬의 수학 문제 풀이에 쩔쩔매며, 변화무쌍한 잭잭에 두 손을 들게 된다.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는 그를 보며, 강력한 힘이 있어도 육아계의 슈퍼히어로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럼 어쩌지?
씁쓸한 뒷맛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연신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특히 은이는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악당과 맞닥뜨린 순간에 심장에 쫄깃해졌다가 작은 아이들이 커다란 어른을 구하는 장면에서 정말 신났다고 했다. 마치 보호라는 이름으로 매일 간섭받는 것에 대해 통쾌한 복수라도 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이 부모의 초능력
식탁에 앉아 과일을 먹던 은이가 물었다.
“엄마, 아빠는 누구의 초능력을 갖고 싶어?”
아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잭잭’이라고 답했다. '마음대로 순간이동을 한다면 출퇴근의 고단함도 없고, 화가 나면 괴물이 되어 마음껏 분노해도 어른들이 훈계는커녕 맛있는 소화액으로 화를 없애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라는 이유 때문이란다.
나도 잭잭이라면 좋겠다. 마음껏 투정도 부리고 내키는 대로 이동하며 심지어 나의 화를 돋우는 이들에게 레이저를 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빠도 잭잭’이라고 답하려는 순간, ‘애드나 모드’가 떠올랐다.
애드나 모드는 패션 디자이너로 슈퍼히어로의 수트를 만드는 인물이다. Mr. 인크레더블은 육아에 지쳐 의식을 잃을 지경이 되었을 때, 애드나 모드를 찾아갔다. 막내 잭잭을 맡기며 딱 하루를 부탁했다. 그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애드나 모드는 잭잭의 초능력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그에 어울리는 슈트를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화가 나 온몸이 불덩이가 되면 이를 없애주는 소화액을, 그것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아이들을 키운다고, 돌본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길들이려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 다그치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해내는 애드나 모드의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다. 비록 악당과 싸우는 슈퍼히어로는 아닐지라도, 아이의 재능을 관찰하고 발견해 잘 발현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초능력자다.
요즘 날씨를 두고 폭염이라고 한다. '햇볕 쪼일 폭'(暴)에 '불꽃 염'(炎). 정말이지 햇볕이 내리쬐는 날 들판에 홀로 남겨져 오갈 데 없는 느낌이다. 마치 독박육아를 하는 듯 말이다. 혹여 오늘도 육아에 지쳐 힘겨운 부모라면, 슈퍼히어로도 힘들어하는 일이니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애드나 모드가 잭잭과 함께 즐겁게 지내며 녀석의 재능에 맞는 수트까지 제작해줬지만, 그 또한 딱 하루였다.
그러니 육아하는 부모들이여. 자괴감에 빠지지는 말자. 지금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폭염에 지친 일상에서 양육자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기 전에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갖자.
사람들은 내일도 폭염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가을은 우리를 향해 출발했다.
*칼럼니스트 윤기혁은 딸이 둘 있는 평범한 아빠입니다. 완벽한 육아를 꿈꾸지만 매번 실패하는 아빠이기도 하지요. 육아하는 남성, 아빠, 남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은밀한 속마음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저서로는 「육아의 온도(somo, 2014)」, 「육아살롱 in 영화, 부모3.0(공저)(Sb, 2017)」이 있으며, (사)함께하는 아버지들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