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느낌은 예측하지 못할 때 불현 듯 찾아오는데, 어제 나는 또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남은 분은 스물하고 세 명뿐. 온 국민이 슬퍼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을 했다고 들었다. 그 비슷한 시간 방학인 큰아이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인 장례식장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아이는 길게 묻지 않고 선뜻 따라 나섰다.
빈소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입구에 많은 국회의원들이 보였다. 언론사 카메라들도 많이 있었다. 안내하는 입구에서 나눠주는 보랏빛 팔찌와 김복동 할머니의 기록이 담겨 있는 리플렛을 받아들었다.
신을 벗고 영정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와 국화꽃을 받아들고 헌화를 한 뒤 짧게 묵념을 했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를 비롯한 상주들과 목례를 하고 나왔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도 그치지 않았다. 빈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아이가 가만히 내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줬다. “엄마, 울지 마”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고.
엄마로 살면서 내가 깨우친 세상의 지혜를 아이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동동거리면서 살아간다. 역사, 정의, 인권, 사람답게 사는 것들에 대해 특히 그렇다.
그런데 지내고 보니, 가장 좋은 것은 부모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열 권의 책보다, 백 마디 말보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연스레 습득한다. 나 역시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고, 핸드폰이나 종일 들여다볼 때 '얘가 혹시 일베(일간베스트) 같은 데 들락거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싸짊어지고 할 때가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하더라. “아이는 부모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잠시 벗어나도 곧 돌아온다.”
그때부터 말로, 글로 아이를 가르치기보다는 내 사는 삶에 더 정성을 쏟기로 했다.
별 다른 설명 없이 나선 차 안에서 아이가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지금 병원에 계신 거야?” 나는 순간 ‘할머니’라는 소리를 나의 친정엄마, 그러니까 아이의 외할머니를 지칭하는 소린 줄 알았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김복동 할머니를 자기 할머니처럼 친근하게 불렀다.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하나.... 수많은 생각들은 그 한 마디로 정리가 됐다. 아, 이 아이, 스스로 느끼고 알아나가겠구나.
그리고 아이는 빈소에서 우는 엄마의 등을 가만히 다독여줬다. 나는 그 순간 이 아이의 양육자, 보호자, 교육자가 아닌 위로받는 한 사람이었고, 아이가 오히려 내 마음의 보호자가 되어 서 있었다. 무엇보다 내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친구 한 명이 내 곁에 서 있어 그날 나는 마음이 참 따뜻했던 것 같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잘 모를 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잠시 헷갈릴 때, 그저 내가 가는 방향으로 손 꼭 잡고 걸어가 보는 것. 그러면 아이가 어느 순간 훌쩍 커서 나를 위로해준다. 친구처럼, 동지처럼.
나비, 노란리본, 동백꽃 배지가 아이 가방에 붙어 있는 그 시간만큼 아이는 훌쩍 자라 하나의 인격이 되었다. 이제 아이와 벗으로 살아가야겠다. 고마운 날.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