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도 아빠처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니?"
"너희들도 아빠처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니?"
  • 칼럼니스트 엄미야
  • 승인 2019.09.2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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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야의 일하는 엄마의 눈으로]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응원하며

'청년 전태일'이라는 단체가 조국 장관을 만났다는 뉴스를 봤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 청년들은 지난 12일 조국 장관에게 ‘공정 사다리’ 모형물을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이를 두고 온라인상에서는 “전태일 이름을 내세운 단체가 조국을 만난 것은 잘한 일이다, 잘 못 한 일이다”로 시시비비를 가르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내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다리.'

그 사다리가 나는 참 싫더라. 거슬렸다. 진보단체라는, 그것도 청년들이라는 사람들의 '진보적 상상력'이 아주 아쉬웠다. 사다리가 공정해봤자 사다리지. 그래봤자 몇 명 올라가지도 못하는 그놈의 사다리 타령은….

사다리는 공정한가? 시험은 공정한가? ⓒ베이비뉴스
사다리는 공정한가? 시험은 공정한가? ⓒ베이비뉴스

◇ 정규직하려면 공정하게 '시험'봐서 들어와라?

그 바로 전날인 9월 11일은 지금이 '2019년'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이 김천 본사에서 경찰의 강제해산에 맞서 상의를 탈의하고 저항하는 일이 있던 날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하고 단순했다.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하라는 것.

그런데 여기서도 어김없이 ‘공정’의 문제가 뜨거운 시빗거리가 되었다. 공사 ‘시험’을 보지도 않은 ‘주제’에 정규직을 요구하는 그녀들을 사람들은 온라인상에서 ‘기생충’, ‘기회주의자’, ‘양심도 없는 사람’으로 비난했다.

“도로공사 공채가 얼마나 어려운데 거저먹으려고 한다.”

“대통령 잘 만나 무임승차해 놓고 더 내놓으라고 떼쓴다. 당신들 수준에 맞게 식당 가서 일해. 분수에 넘치게 대접해주니 지들이 공채 직원인 줄 알아.”

“그리 부러우면 공채로 시험 보고 들어와. 인생 기회주의자들아.“

”농성하지 마시구요. 도로공사에 공채시험 보고 들어가세요. 왜 시험 본 사람하고 똑같이 대우받으시려고 하세요? 불공평한거 아녜요?“

”직접고용하려면 경력 가산점 주고 정식으로 공채선발 해라. 그게 공정한 거다. 누구는 시험치고 들어간 곳을 '꽁'으로 먹는 건 잘못된 거다.“

”세상에 저런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누구는 도로공사 가려고 수년간 뼈 빠지게 공부하고 고생했을 텐데 저 인간들은 쉽게 들어가서 이젠 낙하산으로 정규직 시켜 달라고 하네.“

댓글에는 ‘거저, 무임승차, 분수, 기회주의자, '꽁'으로, 떼쓰는, 양심 없는’ 따위의 혐오 단어들이 넘쳐났다. ‘당신들 수준에 맞게 식당에나 가서 일하라’는 댓글에서는 화를 누르기가 조금 어려웠다. ‘시험’이 곧 ‘공정’이라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자 종교처럼 보였다.

소심하게 변명을 해보자면, 그녀들이 먼저 떼를 쓴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약속 했고, 대법원이 그게 맞다고 판결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험이 곧 공정이고, 학력이나 배움의 수준이 직접의 귀천을 가르는 잣대인 우리 사회에서 진실은 가려졌다.

◇ 교육은 교육으로, 노동은 노동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아빠처럼 공장에서 일할래?“

나는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남편 나름대로는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처럼 기름때 묻히고 일하지 말고, 돈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욕망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우리 둘 다 노동자를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지만, 이번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싸움을 대하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경험하며 현실이라는 핑계로 “너희는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라고 아이들에게 무언의 강요를 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런 압박이 은연중에 아이를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게 만든 건 아닌지, 꿈 많았던 아이의 꿈을 사라지게 만든 건 아닌지, 친구와의 관계보다 경쟁에 더 익숙하게 만든 건 아닌지.

이제라도 우리 아이들만큼은 사다리를 오르지 않아도 행복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험을 보고 들어와야 공사의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그것만이 ‘공정’이라는, 그래서 애초에 그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다른 종 취급하는 저들만의 사다리를 좀 없애야하지 않을까.

지난 9월 18일 제네바에서 한국 정부에 대한 유엔 아동위원회의 심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한국 정부는 위원들에게 이런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의 공교육 제도의 최종 목표는 오직 명문대 입학인 것으로 보인다. 아동의 잠재력을 십분 실현할 수 있도록 하고 발달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만이 목표인 것 같다”

“한국 정부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교육의 목표란 과연 무엇인가? 아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인가, 아니면 아동이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미래를 잘 다루어 나갈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인가?”

교육은 교육 그 자체로, 노동은 노동의 가치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너무 식상한 말이지만 직업엔 귀천이 없어야 한다. 시험제도 하나 바로잡는다고 공정한 세상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불평등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공정은 모두 틀렸다. 거짓말이고 눈속임이다. 누가 10~20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온 톨게이트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공정, 공평 운운할 수 있을까. 학업과 시험, 경쟁보다 노동의 가치가 낮다고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사다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던 동화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1972년)이 떠올랐다.

작은 호랑 애벌레가 애벌레 기둥을 발견하고 산더미 같은 애벌레들을 밟고 올라간다. 하지만 친구였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기둥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다른 애벌레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날 수 있어! 우리는 나비가 될 수 있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사실 애벌레 기둥 위에는 또 다른 수많은 애벌레 기둥들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사다리 말고, 애벌레 기둥 말고, 알을 깨고 날아오르는 나비를 꿈꾸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나는 우리 어른들부터 시선을 좀 바꾸면 좋겠다.

“올라가지 않아도 돼! 네가 있는 곳의 삶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어느 곳보다 귀하게 만드는 것도 소중하단다.” 

톨게이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한다. 그녀들이 이겨야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베이비뉴스
톨게이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한다. 그녀들이 이겨야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베이비뉴스

*칼럼니스트 엄미야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두 딸의 엄마다. 노동조합 활동가이자, 노동자 남편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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