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바비인형 사주고, 딸은 주짓수 시킬까
아들은 바비인형 사주고, 딸은 주짓수 시킬까
  • 칼럼니스트 이은
  • 승인 2019.10.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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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육아 인류학] 성별에 따른 기대와 고민에 대한 인류학자 엄마의 생각

아이를 가졌을 때 했던 다짐들이 있었다. 아이가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 아이가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부모가 먼저 행복한 사람이 되기 같은 것들. 첫째가 아들임을 알고 추가로 더 생각한 것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분홍색 옷과 바비인형을 아들에게 꼭 사주자는 것이었다. 둘째가 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생각했던 것들 중에는 ‘격투기 종목 가르쳐보기’가 있다. 물론 아들과 딸이 거부하지 않는다는 가정에 한에서다.

아들을 임신했을 때, 아이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분홍색 옷과 바비인형을 사주겠다고 다짐했었다. ⓒ베이비뉴스
아들을 임신했을 때, 아이가 거부하지 않는다면 분홍색 옷과 바비인형을 사주겠다고 다짐했었다. ⓒ베이비뉴스

문화인류학자인 나는, 성 역할과 행동 방식이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관점을 믿지 않는다. 사실 인류학자들은 일찍이 수많은 형태의 사회조직을 연구하면서 이미 여성과 남성의 행동 양식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왔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Sex and Temperament in Three Primitive Societies)」(1935)이란 책에서 남녀의 행동 방식이 각 부족별로 다르게 형성됐음을 밝혔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아라페쉬‘ 족은 남녀 모두 부드럽고 이타적인 면을 중시했고, '먼더거머' 족은 남녀 모두 개인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보였다. '챔불리' 족은 남녀의 역할이 세분돼있었는데, 우리의 통념과 달리 경제·정치적 권력을 쥐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쪽은 오히려 여성이었고, 남성은 여성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예술 활동에 종사하고, 성향이 온순했다. 이 연구를 통해 마거릿 미드는 ’성 역할과 성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학습되고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고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일상에는 ‘남자’라서 혹은 ‘여자’라서 그렇다고 여기는 특정한 믿음이 존재한다. ‘여자아이라서 애교가 많다’, ‘남자아이라서 더 활동적이다’같은 것들 말이다. 

◇ 예쁜 장신구 좋아하던 아들, 다섯 살 되자… "여자 같은 거 싫어!" 

나 역시, 기질적인 차이보다 사회·문화적으로 기대되는 ‘역할’과 ‘성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암묵적인 기대가 적어도 우리 집에서만큼은 좀 덜하길 바랐다. 그래서일까? 첫째는 밝은색 옷을 좋아하고, 예쁜 장신구를 좋아하는 아들이었다. 말문도 아주 빨리 터진 편이었고 말수도 많았다. 20개월이 되기 전에 이미 간단한 문장으로 말할 줄 알았으며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어머 아기가 어떻게 말을해” 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아들은 달빛을 보면서 달님도 맘마를 먹는지 궁금해했고, 다리를 다친 멍멍이를 보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아이였다. 세상 모든 둥근 것만 보면 “바퀴!”라고 외칠 정도로 자동차에 열광하는 아이였지만, 귀여운 인형을 보면 어쩔 줄 모르며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였다. 이모의 예쁜 구두가 신기해서 신어보고 애교스러운 표정으로 외갓집 식구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밀당’도 잘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5살,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된 아이는 어느새 분홍색에 질색하고 발레를 배우러 가보자는 이모의 말에 정색하며 “그건 너무 여자 같아서 싫어!”라고 말하는 아이가 됐다. 아이는 어느새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을 나눠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특히 밖에 나가거나 또래 친구들과 함께할 때면 더 ‘멋있는 척’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도 집에 오면 침대에 귀여운 동물 인형들을 가득 쌓아놓고 모두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어느 날은 엄마에게 사랑한다며 오묘하고 간질간질한 시 한 편을 적어주기도 했다. 아이의 하얗던 피부는 햇볕에 그을리고, 올해로 8살이 된 아이는 장난기 많은 표정으로 놀이터를 질주하는 소년으로 자라났다. 

둘째는 오빠처럼 말문이 빨리 터지진 않았다. 하지만 기동력만큼은 대단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실 끝에서 거실 끝으로 ‘순간이동’ 한다. 엄마의 가방과 모자를 챙겨 들고 현관 앞에 서서 외출하자고 조른다. 평소에는 순둥순둥 하다가도, 졸리거나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데, 그 데시벨이 엄청나서 조용한 실내에서는 감당하기가 어렵다.

어느 날엔 제 오빠가 발로 공 차던 것을 흉내 내며 공을 찼는데, 그 공이 의외로 멀리까지 날아갔다. 나는 그녀의 튼실한 팔다리 근육을 보면서 다음에 ‘주짓수를 가르쳐볼까, 아니면 킥복싱을 가르쳐볼까’ 고민 중이다. 물론 딸아이가 하기 싫다고 한다면 전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미국에서 남자들 사이를 전력질주하며 공을 차던 여자 축구선수를 본 순간, 평생 나를 지배해 온 무력감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베이비뉴스
미국에서 남자들 사이를 전력질주하며 공을 차던 여자 축구선수를 본 순간, 평생 나를 지배해 온 무력감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베이비뉴스

◇ 사회가 기대하는 성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일 접하길…

아이들이 어떤 성향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사실 남자답고 여자다운 것을 나누어 특정 역할을 기대하거나 혹은 굳이 그 특정 역할이나 기대에 얽매이지 말라며 반대의 것을 강요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나는 그저 우리 아이들이 사회가 기대하는 성 역할에서 벗어나 다른 성향의 일들도 다양하게 접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경험을 접하게 해주는 것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단, 선택은 언제나 아이들의 몫이다. 

체육 시간에 공 하나 던져주고 "남자애들은 축구하고 여자애들은 그냥 그늘에서 응원해”라는 말을 듣던 나의 학창 시절. 그 묘한 무력감의 이유를 오랜 기간 설명할 수 없었는데, 미국에 와서 난생처음 남녀 연합 취미 축구 리그를 본 뒤 그 무력감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 같았다. 매니저가 아닌, 남자들 사이를 맹렬하게 달리며 공을 차던 여자 선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때도 축구하고 싶었던 여자아이들이 있었을 텐데… 남자아이들 중에서도 그늘에서 응원하고 싶은 아이들이 있었을 텐데… 애초에 ’선택‘이라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때, 그 누구도 좋지 않았을 텐데…' 

처음으로 바비인형을 가진 아들은 아빠와 함께(아빠 역시 바비의 세계가 궁금했다) 바비인형의 옷을 갈아입히느라 신이 났다. 아들과 아빠는 인형에게 이 옷도 입혀보고, 저 옷도 입혀보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바비인형은 우리 집에 온 지 이틀 만에 상자 속에 들어가 다음 주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아들의 관심은 다시 자동차와 로봇에 돌아갔다.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섬세하고 감성이 풍부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벌써 패션에 관심을 부쩍 보이는 둘째. 제일 좋아하는 아이템은 신발이다. ⓒ이은
벌써 패션에 관심을 부쩍 보이는 둘째. 제일 좋아하는 아이템은 신발이다. ⓒ이은

아직 두 돌도 안 된 딸은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움직인다. 딸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오빠가 쭉 사랑하던 아이언맨 피규어다. 그러면서도 딸은, 가끔 제 맘에 드는 옷을 입으면 벽에 기대 포즈를 취하면서 내게 휴대폰을 가져다준다. 빨리 자기 사진을 찍으란 뜻이다. 하늘거리는 느낌 때문인지, 시원해서 그러는지 벌써 치마를 사랑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또 어떤 성향으로 자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아이들이 스스로 해 보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일에 ‘남자다워 보이지 못 할까 봐’, ‘여자다워 보이지 못 할까 봐’라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칼럼니스트 이은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서 큰아이를 키웠고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가 좋은 엄마인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으로 이미 성장해 가는 중이라고 믿는 낙천적인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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