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그녀는 왜 독감으로 죽었을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그녀는 왜 독감으로 죽었을까?
  • 칼럼니스트 김택선
  • 승인 2019.11.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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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K의 육아코치] 독감 예방접종, 이제는 필수다

세계대전이 치러지던 1932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핑크빛 색감, 개성 있는 등장인물, 전쟁 중의 인간 군상을 코믹하게 묘사한 스토리까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내 기준 '명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다. 

그런데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이 영화는 호텔부터 케이크 박스까지 모두 분홍색으로 표현해 시종일관 해피엔딩이 될 것처럼 굴더니만, 주인공은 고생 끝에 얻은 아내 아가사와 아기를 독감으로 잃는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독감으로 죽는 결말이라니. 아니, 그 시대에는 독감 예방주사도 없었고, 치료제인 타미플루(Oseltamivir)도 없었단 말인가? 나는 이 핑크빛으로 도배된, 아름답고 유쾌한 영화의 황당한 결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음에 다시 독감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됐다. 

독감으로 죽는 결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독감의 역사를 따지다 보니 납득이 갔다. ⓒ(주)피터팬픽쳐스
독감으로 죽는 결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독감의 역사를 따지다 보니 납득이 갔다. ⓒ(주)피터팬픽쳐스

◇ 독감 예방백신과 타미플루가 있는 세계에선 이해할 수 없는 결말 

사람들이 독감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이 1932년. 백신을 처음 개발해 2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에게 처음 접종한 것이 1940년.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미국 길리어드 사이언스에서 향신료인 ‘팔각’을 이용해 처음 합성해낸 것이 1996년. 스위스의 제약회사 ‘로슈’에서 판권을 사들여 전 세계에 판매한 것이 1999년. 그러므로 영화의 배경이 된 1932년은 예방백신도, 치료 약도 발견되기 전이었다. 인류가 독감 예방접종과 타미플루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12년 ‘인플루엔자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전염병’을 기록했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첫 기록을 남긴 후 2500여 년이 지나서야 공 모양의 껍질에 N(뉴라미니다제, Neuraminidase)과 H(헤마글루티닌, Hemagglutinin)의 단백질 항원을 가진 RNA바이러스 독감 바이러스의 실체가 밝혀졌고, 예방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됐다. 인류는 참으로 긴 세월 동안 실체도 모르는 바이러스에 저항도 못 한 채 당하고만 있었다.

20세기 인류가 세 번이나 겪은 독감 대유행은 모두 A형 독감에서 비롯했다. 1918년 A(H1N1) 스페인 대유행, 1957년 A(H2N2) 아시아 대유행, 1968년 A(H3N2) 홍콩 대유행이 그것이다. 특히 백신과 치료제 모두 없었던 1918년 스페인 대유행 시 독감 합병증인 바이러스 폐렴이 사망의 주원인이었고 사망한 사람만 최소 5000만 명에 달했다. 1·2차 세계대전 중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그러므로 인류에게 스페인 독감은 거의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독감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황당하고 갑작스러운 결말을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년 2월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하는 백신 권장주에 따라 예방주사를 맞고, 독감에 걸리더라도 타미플루라는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는 현실에 익숙해진 21세기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결말에 어이없어할 것이다. 

예방주사는 잠깐 따끔하고 말지만, 독감은 정말 아프고 위험하단다. ⓒ베이비뉴스
예방주사는 잠깐 따끔하고 말지만, 독감은 정말 아프고 위험하단다. ⓒ베이비뉴스

◇ 독감 vs 인간, 바이러스를 이기는 인간의 필승 무기는 '예방접종'

독감과 인간의 싸움은 일종의 카드 게임에 비유되기도 한다. 치사율이 높은 A형 독감은 H 항원 3가지와 N 항원 2가지가 조합됨으로써 큰 바이러스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즉 총 6가지의 조합으로 타입을 바꾸어서 인간의 면역계를 따돌리고 공격할 수 있다. 이러한 카드 게임에서 독감 예방백신은 인간이 수세에 몰리지 않고 독감에 압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필수 무기다. 이 독감 예방백신이 1932년에도 존재했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결말은 백신이 독감을 예방할 확률과 같은 70~90%의 확률로 분명히 해피 엔딩을 맞이했을 것이다. 

독감 바이러스가 현실에서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복잡하고 치명적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조류, 돼지 등 종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변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류 독감 바이러스는 15가지의 H 항원이 있고, 9가지의 N 항원이 있는데, 이 조합만으로 135가지의 변종을 만들어 인간에게 옮길 수 있다. 1997년 홍콩의 조류인플루엔자 A(H5N1) 독감이 대표적인 사례다.

돼지도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돼지 안에서 인간과 조류, 그리고 돼지의 독감 바이러스가 만난다면 더욱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종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돼지 호흡기 세포는 인간의 독감 바이러스 수용체와 조류 독감 바이러스 수용체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돼지나 닭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키우는 공장식 축산을 없애거나, 사육 환경을 깨끗하게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독감 바이러스가 일으킬 수 있는 많은 경우의 수를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독감과 관련한 사회적 문제는 보건정책을 담당하는 전문가들과 의료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개인의 차원에서 봤을 때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만들어진 독감 예방접종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면역력이 떨어지는 어린이, 노인, 호흡기 질환 환자는 반드시 접종을 해야 한다. 영양가 있는 식단, 충분한 수분 섭취, 규칙적인 생활, 개인 위생수칙을 잘 지키면서 올해 유행이 예상되는 독감 바이러스 예방접종을 한다면 대부분 독감에 걸리지 않고, 그 합병증도 피해갈 수 있다. 

*칼럼니스트 김택선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다. 중앙대 의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 등 여러 병의원에서 소아청소년과 과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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