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최규화 기자】
오늘도 엄마아빠들은 국회에 갔다. 초대받지 못한 문 앞에 서서 ‘의원님’들을 기다렸다. 의원들을 만나서는 또 고개 숙였다. 잘 부탁드린다고. 우리 아이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26일 오후 국회 운영위원장실 앞 복도에 태호 부모, 해인이 부모, 민식이 부모님들이 늘어섰다.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 회동을 위해 회의실로 올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모들의 손에는 이들에게 줄 ‘어린이생명안전법안’ 관련 서한이 들려 있었다.
‘어린이생명안전법안’은 20대 국회에 계류 중인 ‘해인이법’, ‘한음이법’, ‘하준이법’, ‘태호·유찬이법’, ‘민식이법’을 가리킨다. 모두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법안들이다.
약 30분의 기다림 끝에 부모들은 나 원내대표를 만났다. 그의 첫마디는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였다. 2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만남에 이어 오 원내대표도 만났다. 그의 첫마디도 “이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였다. 부모들은 또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꼭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렇다. 누구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도 국회의원에게 고작 한두 마디 전하기 위해서 30분씩 한 시간씩 복도에서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도 직장이 아닌 국회로 매일 출근하고 싶지는 않았고, 300여 곳 의원실을 모두 찾아다니며 법안 통과 동의서에 서명해달라고 호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생 처음 서보는 기자회견장에서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싶지도 않았고, 이곳저곳에서 찾아와 ‘그날’의 일을 묻는 기자들에게 번번이 그 악몽 같은 기억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아이의 이름으로 무슨 법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이 있기 전까지, 누구도 ‘유가족’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경원, 오신환 두 원내대표에게 묻고 싶다. 부모들에게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된다’는 말을 하기 전에,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과연 어떨지.
해인이법은 3년 8개월, 한음이법은 3년 5개월 동안 통과를 기다렸다. 올해 발의된 태호·유찬이법은 6개월째 논의 한 번 없었다.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에서 주목받은 민식이법 역시 발의 이후 2개월 동안 국회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슬픔을 무기로 싸워온 것은 오직 부모들이었다.
태호 아빠 김장회 씨는 지난달 21일부터 25일까지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들과 함께 국회의원회관 내 296곳의 의원실을 찾아 법안 통과 동의서를 돌렸다. 하지만 서명한 국회의원은 92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자유한국당은 109명의 의원 중 단 7명만이 서명했다. 바른미래당도 27명 중 4명만이 서명했다.
◇ ‘빠루’ 충돌 불사하던 결기, 아이들 생명안전 앞에서는 어디로
그때도 ‘행정안전위원회 간사나 찾아가지, 300명 국회의원 전부 찾아가는 건 시간 낭비’라고 말한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 역시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일주일 내내 시간 낭비를 하더라도, ‘악성 민원인’ 취급을 받더라도 이 부모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는 건 왜 몰랐을까.
사실 국회에는 이른바 ‘민원인’들이 수도 없이 들락거린다. 저마다 절박하고 긴요한 ‘민원’ 혹은 ‘청탁’ 거리들을 들고 국회의원들을 만나러 온다. 그럼 해인이, 한음이, 하준이, 태호, 유찬이, 민식이 부모들도 민원인인가. 이들이 자기 이권 지켜달라고 찾아온 건가. 동네에 예산 더 써달라고 부탁하는 건가.
아니면 하다못해 자기 자식이라도 살려내라는 건가. 지금 이들이 살리자는 아이들은 누구인가. 민식이법이 통과돼도 민식이는 돌아올 수 없다. 가슴 아프지만, 해인이도 한음이도, 하준이, 태호, 유찬이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부모들이 아직 남아 있는 다른 아이들이라도 지키자고 매일 국회를 찾아가고 있다. 국회의원을 기다리고, 카메라 앞에서 눈물 흘리고, 온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래봤자 내 아이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내 아이 이름만은 이 법 속에 살려보겠다고.
“‘당신들도 나와 같은 슬픔을 겪어봐야 바꿀 겁니까’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누구든 이런 슬픔을 다시는 겪게 하지 말자고 나서는 건데, 요지부동인 사람이 많아요. (…) 2년, 3년이 지나도 태호는 이 세상에 없어요. 그때도 여전히 슬프겠죠. 그런데 만약 그때도 이런 사고가 난다면, 우리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7월 인터뷰에서 태호 아빠 김장회 씨가 한 말이다.(관련기사 : “태호·유찬이법 속에서 아이가 우리보다 오래 살아 있길”) 나경원, 오신환 두 원내대표에게 다시 묻고 싶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게끔 먼저 싸웠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이렇게까지”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먼저 고개 숙였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20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29.7%에 불과하다. 법안 열 건 중 일곱 건은 잠들어 있다. 역대 최악의 법안 처리율. 선거법과 공수처법 패스트트랙 지정을 막겠다고 ‘빠루(쇠지렛대)’까지 들고 충돌하던 결기와, 청와대 앞 단식농성까지 불사하는 열정은 왜 우리 아이들의 생명과 안전 앞에서는 발휘되지 못한 것인가.
지난 26일 여·야 3당의 원내대표 모두 부모들 앞에서 어린이생명안전법안의 통과를 약속했다. ‘꼭 부탁드린다’는 부모들의 말은 사실 부탁의 말이 아니다. 온 국민이 두고 보겠다는 매서운 경고이자 무거운 명령이다. 더 이상 부모들이 ‘이렇게까지’ 기다리고 ‘이렇게까지’ 고개 숙이게 해서는 안 된다.
20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는 오는 12월 10일로 문을 닫는다. 의원들의 가슴에서 빛나는 금배지 안쪽으로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걸 보여줄 마지막 기회다. 약속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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