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아닌 '배려'로 받은 출산휴가 4개월… 눈치 보였다
제도 아닌 '배려'로 받은 출산휴가 4개월… 눈치 보였다
  • 칼럼니스트 윤정인
  • 승인 2020.01.0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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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과학자 생존기] '대역죄인' 임산한 과학자의 출산휴가를 윤허해주소서!

연구실에 ‘임신 발표’도 했고, 배도 불러오고 있었고, 그렇지만 실험은 쭉 하고 있던 어느 날 지도 박사님이 입덧하는 내가 안쓰럽다고 고기 파티를 열어주셨다. 고기를 먹으며 박사님은 내게 이렇게 물어보셨다.

“출산 휴가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애는 어떻게 키우려고?”

생각도 못 한 질문을 멋쩍게 웃어넘긴 뒤, 그날부터 나는 이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출산휴가. 내가 박사과정을 밟던 당시에는 ‘출산휴학’이 있었다. 그런데 이 출산휴학은 코스웍(Course work, 수업을 듣는 상태)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코스웍이 끝난 박사 4년 차인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다만, 나는 공공기관의 연구생 (학연 연구생)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출퇴근을 연구소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구원 규정대로 휴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며칠 동안 연구원의 내규를 찾아내야 했다. 연구원에 존재하는 ‘학생 연구원의 출산 휴가 조항’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학연 학생들의 휴가는 지도 박사의 재량에 맡긴다’는 한 줄을 찾아냈다. 나의 휴가는 그 한 줄로 끝인가! 이런 현실을 믿을 수 없어 행정팀에 전화해 문의를 해보니  ‘학연 학생은 출산휴가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 학생 연구원들이 출산은커녕 결혼조차 하는 일이 드물던 때라 내규 또한 없던 그때, 나는 쭈뼛거리며 이 ‘비보’를 지도 박사님께 전달했다.

그런데 우리 땡그리(태명)가 운을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박사과정 중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경험한 딸을 둔 아버지셨던 우리 지도 박사님이 또 다시 친정아버지로 ‘빙의’해주신 덕인지, 행정팀의 비보를 들으시고는 너무나도 ‘쿨’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연구소 출산휴가는 보통 며칠이냐?”

“90일입니다.”

“석 달가량 되네. 너 논문 쓸 실험은 다 했지?”

“어… 논문만 치면… 다… 끝난 거긴 하죠…."

“그래? 그럼 내일부터 나오지 마. 너 그냥 쉬면서 논문이나 써. 그리고 애 키우고, 어때?”

너무나도 당황한 내가 “에?” 하고 되물으니, 이렇게 얘기하셨다.

“힘들면 재택근무 해. 실험실에서 무리하지 말고, 논문 쓰고 싶으면 집에서 논문 쓰라고 하는 거야.”

‘감동의 쓰나미’가 벅차게 몰려왔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박사님, 제가 같이 소주도 한 잔 못 마셔 드려서 죄송해요. 조금 귀찮아서 그랬어요…. 아기 낳고 복귀하면 제가 박사님 좋아하는 파전에 막걸리도 같이 많이 먹으러 갈게요….’

쿨한 지도 박사님의 배려로, 나는 내규에도 없는 출산휴가를 받았다. 박사님은 안 나와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냥 임신 막달까지 일하고 애 낳으러 가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사실 내규대로 3개월 휴가 쓰고 복귀하려고 했는데, 임신 9개월 즈음에 임신중독증이 왔다. 우리 지도 박사님은 저녁에 날 데리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우리 남편을 붙들고 “내일부터 쟤 출근시키지 마! 쟤 또 출근하면 네가 혼날 줄 알아!”라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얼결에 4개월의 출산휴가를 쓰게 됐다. 

◇ 내규에도 없는 출산휴가 '배려'로 받았지만… '대역죄인' 된 것 같은 느낌 

임신중독증에 걸려 '코끼리 발'이 되었던 임신 9개월. ⓒ윤정인
임신중독증에 걸려 '코끼리 발'이 되었던 임신 9개월. ⓒ윤정인

미담처럼 들리겠지만, 절대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다. 차라리 내가 정식으로 휴가가 있는 학생이었다면 모를까, 시스템에 ‘점’처럼 존재하던 학생연구자였기 때문에 나의 출산휴가는 사실상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출산급여 역시 정상적인 시스템에 따르자면 받을 수 없었다. 즉, 존재하지 않는 제도를 내가 속한 팀에서 ‘합의’해 줬기 때문에,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받은 것이다.

얼마나 말이 많았겠는가, 또, 저 ‘배려’를 받은 나는 얼마나 가시방석이었겠는가. 없는 휴가를 만들어서 쉬었기 때문에, 누군가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출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늘 안절부절못했다. 또, 나를 배려해주신 지도 박사님의 면을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어서 빨리 복귀해야 한다는 강박도 생겼다. 그리고 내가 팀에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출산이 주변의 배려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던 시기였다. 매일같이 연구원 단체 채팅방에 “언니! 이거 어딨어요?”, “누나! 이거 어딨어요?”, “누나, 실험 이거 하라는데 노트 어딨어요?” 등의 질문이 올라왔다. 조리원에서조차 나는 핸드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실 쉬면 안 되는 내가 연구실 후배들의 민원도 해결을 안 해주면 괜히 큰 '대역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어서, 그래서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오죽하면 애 낳으러 가던 날에 “나 애 낳으러 간다”는 ‘공지’까지 보냈을까.

그때 학생 연구원도 결혼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다면, 그래서 경조휴가나 출산휴가, 육아휴직이 제도로 자리잡아 있었다면 부담없이 온전히 아이와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 의미에서 어느 곳이나 학생들도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출산휴가 등의 내규 좀 만들어 달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대학원생도 성인이다! 학생이지만 저희도 결혼할 수 있어요! 애도 낳을 수 있어요! 합법적인 휴가 좀 주세요!”

◇ 육아휴직은 언감생심인데… 아이 초등학교 가면 어쩌지 

분위기가 이럴진대, 육아휴직은 입도 뻥긋 못했다. 출산휴가도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라 애 낳고 빨리 복귀하겠노라 다짐했다. 게다가 출산휴가도 없는데 육아휴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또, 육아에 온전히 집중하기엔 매일매일 쏟아지는 논문이 너무 많았다. 이공계 연구원의 특성상 3년 안에 실적이 필요한데, 그 실적을 채우기에 1~2년의 육아휴직은 내 경력을 나 스스로 단절시키는 꼴이라고 생각했었다. 

연구직의 특성상, 아침에 출근해서 오늘은 어떤 연구가 유행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유행에 내가 지금 뒤처진 게 있는지, 내 연구에 더 접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파악하기 위해 자리가 올라갈수록 실험은 필수요, 트렌드 확인을 위한 인터넷 서핑도 계속해야 했다.

동향도 살피고, 어느 회사에서 무슨 약을 냈는지도 보고, 내가 하는 연구랑 비슷한데 망했다고 하면 같이 슬퍼해 주고, 그들의 슬픔을 바탕으로 나의 개선책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또 매주 미팅 때 발표 해야 하고….

매일매일 쏟아지는 신규 논문 알림 메일들. ⓒ윤정인
매일매일 쏟아지는 신규 논문 알림 메일들. ⓒ윤정인

이런 현실 속에서 육아휴직을 1년이나 쓴다? 육아휴직을 쓴다는 건 그때 나에겐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육아휴직을 고려하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하는 이유 역시 순식간에 유행에서 뒤처져 ‘감’이 없는 과학자가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육아휴직한다고 실험을 손에서 놨다가, 다시 실험실에 갔을 때 실험 감이 떨어져 있을까 봐 무섭다. 실제로 연구직은 그래서 이직 때 쉬는 기간도 최대 6개월이다. 

또, 기업은 부설 연구소를 유지하려면 상시 인원 기준을 준수해야 하는데, 벤처기업은 상시 인원을 최소로 유지하는 일이 많아서, 6개월 이상 휴직해서 상시 인원이 빠져나가면 인증이 취소될 수도 있어서 쉽게 휴직계를 던질 수도 없다. 

물론 이러한 공백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대체인력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직의 특성상 6개월~1년 잠깐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가르쳐놓고 쓸 만해지면 내보내는 꼴이라, 오히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기업이 그 제도를 이용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또한 이러한 대체 연구 인력은 사원급을 지원할 뿐, 나같은 관리자급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속한 연구 분야의 경우에 한해서 말한다. 이 동네는 연구 분야의 특성상 Case by Case(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항별로 다르다)가 심하다. 

◇ 내 속도 모르고 "둘째 낳아라" 종용하는 세상, 야속하다 

내 사정도 모르면서 왜 둘째 안 낳냐고 종용하는 세상이 야속하다. ⓒ베이비뉴스
내 사정도 모르면서 왜 둘째 안 낳냐고 종용하는 세상이 야속하다. ⓒ베이비뉴스

어쩌면 ‘육아휴직’이란 내가 아직 도전해본 길이 아니기에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아이가 아직 여섯 살이라 유치원에서 종일 놀다 오니 그동안은 육아휴직을 고려하지 않았으나, 돌봄 공백이 생기고, 그래서 많은 엄마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초등학교 1학년의 시기가 오면 나도 육아휴직을 써야 할 것 같다는 고민을 한 적 있다.

그러나 지금 직장에 계속 다니는 한, 직위 때문에 상시 전담인력에서 내가 빠질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아마 난 계속 육아휴직은 못 쓸 것 같고, 대신 육아기 단축근로제를 육아휴직 대신 써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 중이다. 

정부에서는 출산율이 자꾸 떨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해서 출산율도 낮아진다는 말도 한다. 길 가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 동네 아줌마, 택시 기사님, 옆집 할머니, 엄마 친구, 아빠 친구, 다들 나에게 “왜 둘째는 없냐”고 묻는다.

애가 혼자 외롭다고. 성격이 나빠진다고. 심지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 똑똑한 대한민국이 된다”는 오지랖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하나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임신중독증을 겪은 후 임신이 나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육아와 나의 커리어를 맞바꾸기에, 나는 내가 하는 연구를 좋아하고, 또 그 일이 재밌다. 아이를 정말 사랑하지만, 지금의 위치까지 오기 위해 내가 공부한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 시간이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한 지금 자리에 오래 있고 싶다.

또, 지금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연봉을 포기하고 있는 만큼, 둘째가 생겼을 때 내가 더 무엇을 희생해야 할지 이젠 감조차 오지 않는다.

아이와 바꿔야 하는 일들은 어쩌면 각자의 인생에서 큰 부분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고, 커리어나 생계에 위협을 받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개인의 사정은 깡그리 무시하고 ‘출산율이 낮아 나라의 위기이니 애국심으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 ‘외동은 이기적이니 둘째를 낳아야 한다’, ‘큰애가 외로우니 동생이 있어야 한다’, '애를 낳으면 돈을 주겠다….'

이렇게 말하는 세상이 참 야속하게 느껴진다. 

*칼럼니스트 윤정인은 대학원생엄마, 취준생엄마, 백수엄마, 직장맘 등을 전전하며 엄마 과학자로 살기 위해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고, ESC(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에서 젠더다양성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프로불만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회사 다니는 유기화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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