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사라진다… 도시가 지켜야 할 ‘놀이의 세계’
아이들이 사라진다… 도시가 지켜야 할 ‘놀이의 세계’
  • 기고=이선영
  • 승인 2020.06.0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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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놀아요?④] 이선영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서울아동옹호센터 옹호사업팀장

놀이를 빼앗긴 대한민국 아이들. 놀이라는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서울시 아동 놀이권 조례 제정을 위한 시민연대’의 연속 특별기고로 놀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 편집자 말

놀이터가 사라진 도시, 아이들이 사라진 놀이터 ©베이비뉴스
놀이터가 사라진 도시, 아이들이 사라진 놀이터 ©베이비뉴스

사람은 일곱 살이 되면 초인종을 누른 뒤 빠르게 도망가는 능력이 생기고, 아홉 살이 되면 공기를 손등에 올렸다 재빠르게 낚아채는 능력이 생기도록 DNA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놀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오직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천부적’ 놀이 재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생각에 더 확신을 갖게 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안전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단조롭고 지루한 조합놀이대를 전국 놀이터에 설치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 조합놀이대에서 최대한 스릴 있고 역동적으로 놀 수 있는 ‘지탈’(‘지옥탈출’의 준말)이라는 놀이를 개발했다.

술래가 눈을 감고 조합놀이대 위에서 도망 다니는 친구들을 잡는 놀이인데,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면 이 놀이를 하며 논다고 한다. 누군가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한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요즘 아이들의 DNA에 ‘지탈’을 하는 능력이 추가돼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한 일이다.

신기하게도 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이들에게는 누구에게 배우거나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찾아내고 장난치는 방법을 개발하는 재능, 주어진 환경에 맞게 가장 재밌게 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80·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모래 바닥 놀이터에서 수십 가지 놀이를 했고, 동네 골목에서도 할 수 있는 모든 장난을 즐겼다. 하지만 도시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높은 요즘 아이들은 자신들의 공간으로 겨우 허락받은 놀이터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개발한다.

그리고 놀이터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아이들은 또 다른 공간, 주로 디지털 세계를 찾아나선다. 휴대폰과 컴퓨터에 놀이터를 만든다. 아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며 ‘놀이 생존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놀이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놀이가 먹고 자는 일처럼 당연하고도 필수적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 아이들의 DNA에는 ‘놀이 생존 전략’이 들어 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공간, 마음껏 노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지쳐가고 있다. 천부적 놀이 재능과 본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아동 행복도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 됐고, 여가 시간 결핍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통계는 지겹도록 바뀌지 않고 있다.

다행히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쉬고 놀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학업 스트레스와 놀이 결핍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이 나타나면서 관련 기관이나 지자체에서 놀이를 위한 사업을 많이 진행하고 있다.

이런 사업을 할 때면 담당자들과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사업 계획을 짜거나 자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진짜 전문가들이 빠진 회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미없는 놀이터,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청소년문화센터, 퇴근한 엄마와 함께 갈 수 없는 동네 도서관 등 진짜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지 못하는 사업으로 연결될 때가 많다.

실제 경험에 비춰봐도 그렇다. 초등 고학년 이상인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제안에 대해 “그 나이 아이들은 학원에 가기 때문에 어차피 놀 시간이 없다”, “그 또래 아이들은 핸드폰과 컴퓨터로 논다. 올 아이들이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아이들의 의견은 다르다.

도시가 넓어질수록 아이들이 놀 공간은 오히려 좁아졌다 ©베이비뉴스
도시가 넓어질수록 아이들이 놀 공간은 오히려 좁아졌다 ©베이비뉴스

“청소년들을 위한 놀이공간을 확보해주세요. 청소년들이 놀이터에서 놀면 꼬마 애들이 다칠까봐 불안하거든요.”(서울, 16세 아동)

“제 친구들하고 놀 때 놀이 시설이 없어서 핸드폰이나 게임기를 가지고 노는 게 싫어요.”(광주, 11세 아동)

“저는 학원 갔다 와서 만날 누워서 컴퓨터 게임만 하게 돼요. 놀이터를 만들어주세요 그럼 더 밖에서 많이 뛰어놀게요.”(부산, 11세 아동)

“제가 사는 지역에 청소년, 어린이들이 편히 놀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유흥업소나 허름한 공터가 대부분입니다. 큰 변화는 바라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공간이더라도 부디 편히 쉴 수 있는 청소년 쉼터를 만들어주세요”(경남, 17세 아동)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아동들에게 대통령에게 제안하고 싶은 정책을 물었을 때 대답한 내용 중 일부이다. 그저 편하게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벤치라도 만들어달라는 아동, 떠들며 놀아도 혼나지 않는 놀이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동도 있었다.

◇ 놀이터를 빼앗기고 갈 곳이 사라진 아이들의 절박한 호소

도시 개발로 놀이 공간을 빼앗기거나 애초에 놀이 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사는 아이들, 그리고 더 어린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양보하고 갈 곳이 사라진 아이들의 절박한 호소다.

공부만 하느라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 못 나오는 것이다. 휴대폰, 컴퓨터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 그 곳에 놀이터를 만든 것이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을 잠깐만 떠올려보면, 그리고 주변 아이들의 이야기에 조금만 귀 기울여보면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놀이기구,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멋진 문화센터가 아니다.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골목, 조금만 걸어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놀이터가 있는 동네,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 있어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벤치가 있는 마을.

요즘 아이들은 많은 어른들이 어린 시절 당연히 누렸을 이런 소소한 경험조차 빼앗겼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내가 살아도 되는 곳인지 확인받는 것, 어린이라는 이유로 내가 사는 공간에서 배제당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 생존 전략’을 짜야 놀 수 있는 사회가 돼버렸다면, 어른들은 이 삭막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어린이들의 생존 전략’을 짜야 한다.

아이들에게 마음 편하게 쉬고 놀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조차 인색한 도시, 보이지 않는 디지털 세계에 스스로 놀이터를 만들어야 겨우 놀 수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어린이를 시민으로서 존중하기 위해 너무나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일이라는 것, 놀이터와 쉼터를 내어준다는 것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성인들과 도시의 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서울시 아동 놀이권 조례 제정 함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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