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비빔면을 끓일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누구나’ 비빔면을 끓일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 칼럼니스트 박현주
  • 승인 2020.07.2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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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꿈을 꾸는 아이] 발달장애 아이의 삶에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법②

저는 아이들이 사는 세상이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느리더라도, 빠르더라도, 잘하더라도 혹은 잘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랍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아 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동기’,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고 싶은 마음’이 아이에게 생기려면 기대가 있어야 하고, 적절한 성공을 경험해야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이들이 ‘성공’을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인지 말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성공하는 재미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할 것 같아서요. 제한된 능력만으로도 소소한 성공을 경험하는 일, 어렵지만 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가 함께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 비빔면 끓이기에 실패한 이유, 단지 아이가 '발달장애아'여서 그랬을까

아홉 살 발달장애 아동과 비빔면 끓이기에 도전했습니다. 아이는 실패했습니다. 이 아이가 비빔면 끓이기에 실패했던 이유는 과연 아이의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일까요? 라면회사,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서 비롯한 일은 아니었을까요? ⓒ베이비뉴스
아홉 살 발달장애 아동과 비빔면 끓이기에 도전했습니다. 아이는 실패했습니다. 이 아이가 비빔면 끓이기에 실패했던 이유는 과연 아이의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일까요? 라면회사,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서 비롯한 일은 아니었을까요? ⓒ베이비뉴스

저는 아동발달센터 사설 치료실에서 인지 치료사로 일 한 적이 있습니다. 유아특수교육을 공부하고, 특수학교 유치부에서 근무하다 어린이집 운영한 경험이 전부였던 시절, 이곳에서의 경험은 유아기로 한정했던 저의 ‘장애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아이 중 아홉 살 발달장애 아동이 떠오릅니다. 그 친구는 왜 한글과 숫자를 배우고 읽어야 하냐며, 한글과 숫자만 가르치는 인지 치료 수업을 지루해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위해 저는 학습지부터 치우고 무엇을 함께 하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이가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우리는 다음 시간부터 한글 문제집, 숫자 학습지 대신 요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물으니 비빔면이라더군요. 다음 시간에 제가 비빔면 재료를 준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한 비빔면 만드는 날, 아이와 책상에 앉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빔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모두 준비해줄게. 대신 네가 요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야 해.”

아이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비빔면을 맛있게 먹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이 손을 잡고 마트까지 가서 함께 사 온 비빔면 한 봉지는 야속하게도 그날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비빔면을 끓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라면 봉지 뒤에는 조리 방법이 아주 단조롭게 쓰여있습니다.

1. 600mL 이상의 끓는 물에 면을 3분간 익힙니다.

2. 찬물에 면을 헹구고 물기를 뺀 후 스프로 비빕니다.

3. 오이, 양배추, 계란 등과 함께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4. 나트륨(식염 등) 섭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기호에 따라 적정량의 스프를 넣어 드십시오.

사실 비빔면 뒷면에 제시된 3번과 4번은 권고 사항일 뿐, 아이가 요리에 참고할 수 있는 사항은 1번과 2번에 불과했습니다. 고작 아홉 살짜리에게 ‘600mL’라는 물의 양도 가늠이 어렵죠.

아이는 한 솥 가득 물을 끓이는 실수를 했고, 결정적으로 ‘찬물에 면을 헹구고’라는 문장을 제대로 못 읽어서 면이 뜨겁게 끓는 중에 비빔면 소스를 넣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던 저는 요리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도 아이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망쳐버린 비빔면을 바라보던 아이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맛있고 매콤한 비빔면을 기대했는데, 토마토 수프같은 액체에 푹 담긴 비빔면이라니…. 요리를 이렇게 망치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해준 저를 아이는 야속한 듯 쳐다봤습니다. 

“네가 조금 더 집중해서 글을 읽었더라면, ‘찬물에 헹구고’라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만 생각해보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위로를 가장한 훈계를 전하는 제 마음이 어쩐지 편하지 않았습니다.

두 어 번 더 도전한 후에,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비빔면 끓이기에 성공했습니다. 아이는 “비빔면을 맛있게 먹으려면 ‘3분’이라는 시간도, 600mL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아야겠다”라고 말하더군요. 아이가 모처럼 자발적인 학습 의지를 보였기에 보람차기도 했으나, 눈물 젖은 비빔면을 먹는 아이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비빔면 조리법을 그림으로 설명해달라!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만 비빈다고 누구나 쉽게 비빔면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6년 비빔면 조리법 설명. 그림 없이 글로만 적혀있습니다. ⓒ박현주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만 비빈다고 누구나 쉽게 비빔면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6년 비빔면 조리법 설명. 그림 없이 글로만 적혀있습니다. ⓒ박현주

이 친구와 비슷한 수준의 아이와는 짜파게티를 끓였습니다. 아이는 조금 헤매긴 했어도 한 번에 짜파게티 끓이기에 성공했습니다. 짜파게티와 비빔면 중 신기하게도 성공할 확률이 높은 건 짜파게티, 실패할 확률이 높은 건 비빔면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경험도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었겠지만, 제가 눈여겨본 것은 비빔면과 짜파게티 조리법이었습니다. 짜파게티는 뒷면에 만드는 과정을 세 컷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었거든요.

이 차이점을 알고 아이에게 무척 미안해졌습니다. 아이가 비빔면 끓이기에 실패했던 이유는 아이의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라면회사의 무심함 때문일까?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발달장애 아동들은 살면서 이런 소소한 일에서조차 늘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 아닌가 싶어서요.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이 성공을 학습할 때 더 많은 동기가 부여되고, 더 적극적인 태도로 학습에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발달장애 아동에게 매 순간 성공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잔뜩 안고 마트에 갔습니다. 그리고 마트에 진열된 라면봉지를 모조리 확인해봤습니다.

어떤 라면은 조리법을 그림으로 친절하게 설명했고, 어떤 라면은 야속하게도 2~3줄에 불과한 줄글로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간단한 문장이 아닌 복합문의 구조로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아이들이 라면 끓이기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퇴근 시간 이후였음에도 라면회사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습니다. 

‘발달장애 아이들도 라면을 혼자 끓여 먹을 수 있게 그림 자료를 라면 패키지에 넣어주세요. 하지만, 이 일은 단지 발달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에게도, 어르신들에게도 이런 디자인은 유용합니다. 모든 사람이 맛있게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게 포장 디자인을 바꿔주세요.’

2020년에 다시 만난 비빔면 조리법. 그때, 이 뜰채 그림이 있었더라면 아이는 비빔면 끓이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박현주
2020년에 다시 만난 비빔면 조리법. 그때, 이 뜰채 그림이 있었더라면 아이는 비빔면 끓이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박현주

그 뒤 몇 달간 제 의견이 반영됐는지 확인하고자 열심히 마트를 들락거렸으나, 몇 달 만에 바뀌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칼럼 ‘발달장애 아이의 삶에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법’을 쓰기 위해 마트에 가서 비빔면을 확인한 순간, 빙그레 웃음이 났습니다.

언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비빔면 조리법이 그림으로 간결히 설명돼있었거든요. 저 그림에 있는 뜰채만 봤어도 그때 그 아이가 적어도 비빔면 끓이기에 실패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라면회사가 일부러, 발달장애인은 고객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줄글로 된 조리법을 넣었던 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중 ‘무지’에서 비롯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아마 라면회사 패키지 담당자들도 발달장애인을 겪어보지 못해서, 비빔면 만들기에 실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고민을 못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우리 애 편하게 좀 살자"고 외친다고 '이기적인 부모' 아닙니다

특수학교에 처음 취업하고, 첫 부모 모임 때의 일입니다. 중증장애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한민국에선 도무지 살 수가 없어요.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래서 이민을 알아보고 있어요. 캐나다나 유럽 쪽은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나 인식이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제 첫 제자가 이민을 하다뇨. 저렇게 환히 웃는 아이와 오래, 함께 지낼 수 없다니, 너무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우리 함께 대한민국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나만 생각하는 이민 말고, 이다음에 만날 또 다른 ‘내 아이들’을 위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소소한 ‘장애아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고민을 같이 해봐요.”

그날 우리의 화두는 ‘대한민국의 무지한 사람들에 맞서 장애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모임에서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을 위한 민원 한 개씩 넣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아이 편에 서서 세상을 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학기 ‘아버지 모임’ 날(우리는 같은 반 아버지들과 함께 아버지 모임을 만들어 한 학기에 한 번씩 모여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이민하겠다던 아버님이 이런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휠체어 탄 아이가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보도블록의 단을 없애 달라고 민원을 넣었거든요. 근데 정말 거짓말처럼 시청에서 실사를 나오고, 일주일도 안 돼서 보도블록 턱을 모두 없애주더라고요. 화를 내면서 이야기 한 제가 도리어 민망해질 정도로 친절하게 민원이 처리되는 것을 보고 반성했습니다. 저조차,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을 싫어할 것이란 편견이 있었구나 싶어서요.”

다른 아버지들도 하나둘 소소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습니다. 장애인 주차장을 만들어달라고 한 이야기, 장애아이를 둔 부모를 지원해달라고 직장에 요청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이런 것을 깨달았습니다.

적어도, 세상이 먼저 장애아이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라고. 다만 무지에서 시작된 장애아이에 대한 인식이 차별로 굳어지는 과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것조차 장애아이를 자녀로 둔 가족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함부로 물어볼 수 없었다는 비장애아 부모의 말마따나, 지나친 배려가 오히려 변화를 차단해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했습니다.

발달장애 아이의 삶에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법, 어렵지 않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세상에 나오면 됩니다. 아이와 ‘장애도(島)’라는 섬에 갇히지 마세요. 불편하고,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다면 이야기하고, 소리치세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는 일도, 내 아이에게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세상을 가르치는 일도 아이를 가르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내 아이만 생각하는 ‘이기심’이라고 생각해 소리 내는 일을 주저하지 마세요. 발달장애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발달 장애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입니다.

*칼럼니스트 박현주는 유아특수교육을 전공해 특수학교에서 근무했다.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내 아이를 함께 키우고 싶어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됐다. 화성시에서 장애통합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부모님들과 함께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데 동참해, 현재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에서 장애영유아 발달상담도 함께 하고 있다. 다양한 아이들을 키우는 일, 육아에서 시작해 아이들의 삶까지, 긴 호흡으로 함께 걸음으로 서로의 고민을 풀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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