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 데이(Halloween Day)를 맞은 동네 아이들이 사탕을 달라고 초인종을 누른다. 40대 난임 부부 레이첼과 리처드는 집 안에서 불도 켜지 않고 속삭인다.
“쟤네는 왜 온 거야?”
“사탕 때문에.”
“젠장.”
- 영화 ‘프라이빗 라이프’ 장면 중
집에 없는 척하려고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남의 집 애들더러 “젠장”이라고 짜증을 내는 이들의 모습이 과거의 내 모습과 겹쳐졌다. 지금은 쌍둥이 엄마가 됐지만, 나는 예전에 난임이었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애먼 아이들이 미웠고,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더더욱 마주하기 싫던 시절. 나는 그 시절을 거쳐 시험관 시술 8차 만에 겨우 우리 아기들을 만났다.
◇ 난임 부부 '난관의 종합세트' 담았으면서도 시종일관 차분한 영화
타마라 젠킨스 감독의 영화 ‘프라이빗 라이프(Private Life, 2017)’의 주인공 레이첼과 리처드는 뉴욕에 사는 작가 부부다. 이들은 의학적으로 부부 모두에게 문제가 있어 난임을 진단받았다. 함께 시험관 시술을 받는 중이고, 입양을 고려하며 생모와 만나려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다. 시술에 거듭 실패한 부부는 병원에서 난자 기증을 제안받고 의붓 조카인 세이디에게 기증을 부탁한다.
영화를 만든 타마라 젠킨스 감독은 실제로 난임을 겪었다. 감독은 주인공 부부의 고통을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려낸다. 여성 난임, 남성 난임, 인공 수정, 시험관 시술, 난자 기증, 입양까지…. 난임 부부가 맞닥뜨릴 수 있는, 거의 모든 ‘난관의 종합 세트’라고 할 만한 줄거리인데, 영화는 시종일관 차분하다.
앞서 서술한 핼러윈 데이 장면이 그렇다. 레이첼과 리처드 아무도 울지 않고,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지금 얘네 되게 슬퍼’라고 강조하는 클로즈업도 없고 극적인 음악도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사탕을 포기하고 돌아가면 전혀 중요한 장면이 아니었다는 듯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리처드와 레이첼이 조카 세이디의 난자 기증과 관련하여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다시 핼러윈 데이를 맞는다. 작년에 왔던 아이들이 또 초인종을 누르는데, 이번에 리처드는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사탕을 준다. 리처드의 고통을 그릴 때 호들갑 떨지 않았듯이, 그의 변화에도 마찬가지로 영화는, 그저 한 차례 고통이 지나갔고, 지금은 그 고통이 잠시 잠잠한 순간일 뿐이라는 듯 조용히 리처드를 바라본다.
◇ 그 시절 내게 필요했던 것… 위로도 응원도 아닌 '건조한 시선'
우리 사회는 ‘난임인(人)’에 무지하다. 실제보다 더 불행할 거라고 과장된 상상을 하거나, 아예 없는 질병인 것처럼 쉬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난임을 바라보는 ‘유효한 시점’을 제공한다.
고통을 그리지만, 그 고통을 부풀리지 않고, 그렇다고 그 고통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 부부를 동정하지 않고, 특별한 사람들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저 이런 사람들도 있으니 한번 보시라고, 넌지시 그들의 ‘프라이빗 라이프’를 관객들 앞에 펼쳐 보인다.
아무런 가치 판단하지 않고, 그저 ‘이런 삶도 있다’라고 옆에서 지켜봐 주는 카메라 같은 시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건조하게 봐줬다면, 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 시절을 조금 더 쉽게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내가 난임일 줄이야’라며, 당황해서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난임일 리 없어, 절대적으로 아이는 올 거야’라고 스스로 과도한 희망을 불어넣거나 ‘이 짓(=시험관)을 더할 순 없어, 나는 아기를 품을 수 없는 몸인가 봐’라고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비하했다.
물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중도를 지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 영화의 시선처럼 담백하게 자신을 스스로 가만히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임신한 동료의 부른 배에 눈길을 주는 것마저 괴로웠던 그 시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약이었던 것 같다.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영화관에 갈 시간이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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