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를 지켜라!’… 바리케이드로 길 막은 아이들
‘놀이를 지켜라!’… 바리케이드로 길 막은 아이들
  • 기고=이수정
  • 승인 2020.09.0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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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놀아요?⑭] 이수정 사단법인 놀이하는사람들 상임대표

놀이를 빼앗긴 대한민국 아이들. 놀이라는 ‘권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서울시 아동 놀이권 조례 제정을 위한 시민연대’의 연속 특별기고로 놀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 편집자 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베이비뉴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베이비뉴스

지난 6월 말경에 우연히 보게 된 뉴스의 한 장면. CCTV를 통해 고스란히 남아 있던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초등학생 두 명이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 벤치에 누워 낮잠을 자던 아저씨가 자신의 낮잠을 방해한다며 아이들에게 발길질을 하다못해 흉기까지 꺼내들었다.

겁이 나서 도망가던 아이는 하마터면 자동차에 치일 뻔했다. 흉기를 들고 아이를 쫓아가는 아저씨를 지나가던 청년이 말렸다. 하지만 아저씨는 청년에게까지 흉기를 휘둘렀다. 요즘 워낙 자극적인 뉴스가 많아 어지간해서는 놀라지도 않지만, 그날의 뉴스는 놀랍기도 했고 화가 나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더위를 피해 시원한 그늘이 있는 공원의 의자에서 낮잠을 청했을 것이고, 아이들은 방과후 자투리 시간에 공차기를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 집도 아니고 일터도 아닌 공공의 공간에서 한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했고 아이들은 좋아하는 공놀이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욕구가 좌절됐다고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그곳은 어린이공원이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일상에서 종종 보고 듣는다. 최근 들어서 지하철 등에서 ‘마스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에서 보듯이, 욕구의 충돌이 생기면 힘을 과시하는 방식을 쉽게 취한다.

그리고 누구의 권리와 이해관계가 먼저인지를 놓고 사람들은 온라인상에서 또 갑론을박한다. 혹시 우리는 두 개의 욕구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을 서로 이해하고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해법을 함께 찾기보다는, 힘센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가 싶어 걱정스럽다.

◇ 2020년 대한민국과 1972년 네덜란드의 공통점

시공간을 옮겨 좀 오래된 이야기 하나. ‘1972, 자동차에 맞선 암스테르담 아이들’은 1972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실제 일어난 일을 기록한 흑백 다큐멘터리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1972년 당시 암스테르담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놀이공간은커녕 자신들이 놀던 길거리마저 나날이 늘어나는 자동차에 빼앗기고 있다고 아이들은 생각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조차 불분명해서 자동차와 사람이 뒤섞여 다녔고, 그래서 가장 많이 위험에 처하는 것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차츰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에 자신들의 놀이공간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어른들과 의논하고, 관계기관의 대표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했다.

아이들은 자동차들이 다니는 길 한쪽을 막아 일부 구간을 자신의 놀이공간으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하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러자 트럭을 끌고 그곳을 지나려던 한 아저씨가 내려서 그 바리케이드를 치웠고, 아이들을 지지하는 또 다른 어른은 다시 바리케이드를 쳤다.

옥신각신 두 사람이 바리케이드를 두고 다투는 장면을 뒤로 하고, 길을 막은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한 놀이공간을 만든다. 자동차를 안내해서 다른 길로 가도록 하고, 길을 막아 공간을 확보하고 깨끗하게 길을 쓸기도 한다. 확성기를 들고 길에서 연설을 하고 피켓도 만들고 현수막도 쓴다.

드디어 놀이공간을 처음 확보한 날 - 물론 잠시지만 - 아이들은 자루에 두 다리를 집어넣고 깡충깡충 뛰어 다니는가 하면, 아스팔트 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도 타고 줄넘기도 하고 공차기도 하며 처음 만들어진 놀이거리를 발랄하게 채웠다.

끝날 무렵 계속해서 들리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이 다큐가 해피엔딩임을 말해준다.

◇ 놀 권리는 ‘나중에’? 권리에는 순서가 없다

누구나 욕구는 있다. 다만 그 욕구는 때때로 다르다. 형편이 어려워 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이는 부모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보장받는 것이 우선일 것이고, 학대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같은 나라에 살고 나이가 같아도 누구에게는 임대주택이 절실하고 누구에게는 보호기관이 절실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몸이 약한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기를 원할 것이고, 다른 사람과 외모나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아이는 차별받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전쟁 중인 국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생명을 보장받기를 원할 것이고, 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 아이는 학교에서 마음 놓고 교육받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개인의 욕구에 따라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두 40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많은 권리들이 앞에 있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뒤에 있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밥 잘 먹고 옷 잘 입고 학비 걱정 없이 학교 다니는 요즘 아이들이 부족할 게 뭐 있냐고 지레 결론 내리는 어른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같은 환경에 처해 있어도 개인마다 먼저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듯, 타인의 권리에 대해 나를 기준으로 예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권리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이것 지키고 나서 저것이라는 식의 순서도 있지 않다.

앞서 소개한 1972년과 2020년에 있었던 두 개의 사건은 48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닮아 있다. 닮았지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뿐 아니라 놀이 시간 또한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2020년 대한민국의 아이들의 현실이 더 서글프다.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 놀이시간과 공간 그리고 함께 놀 친구에 대한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로 집 안에 갇힌 아이들에게 과제만 잔뜩 내어줄 것이 아니라, 학교도 집도 아닌 제3의 공간, 공공놀이공간과 놀 시간의 확보에 대해 이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시민참여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에서는 “아이들의 놀 권리를 보장하는 조례를 만들면 어떨까요?”라는 주제로 온라인 토론이 진행 중입니다. 9월 12일까지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시민토론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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