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노동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 그건 첫 단추일 뿐이다
명절 노동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 그건 첫 단추일 뿐이다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02.1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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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큰엄마의 미친 봉고'(2021)

차례를 준비하던 여성들이 단체로 봉고를 타고 사라진다. 차례 파업! 요즘 같은 세상에 간이 부어도 한참 부은 이 집안 남자들, 차례 준비는 털끝만큼도 함께 하지 않고 다과상을 요구하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참다 못한 큰며느리가 며느리 군단을 이끌고 봉고를 타고 떠나버린다.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비싼 옷도 남편(집안의 장남이자 큰아버지) 카드를 북북 긁어서 사고, 캠핑도 한다. 차례 준비 좀 했다는 한국 여자라면, 누구든지 한번쯤은 이런 미친 봉고 타고 시가를 탈출하는 꿈을 꿔보지 않았을까.

앞치마를 두르고 영문도 모른 채로 봉고에 탔다가 멋진 옷을 차려 입고 변신한 '며느리즈' ©(주)백그림
앞치마를 두르고 영문도 모른 채로 봉고에 탔다가 멋진 옷을 차려 입고 변신한 '며느리즈' ©(주)백그림

8년 전 결혼 후 첫 명절이 떠오른다. 차례와 식사까지 마치고 시어머니는 나의 본가로 출발하는 우리 부부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나의 시가 가족들은 대한민국 평균을 상회하는 점잖은 분들이셨고, 남편은 결혼 전부터 명절 노동을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능숙하게 차례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첫 명절 내내 ‘난 누구 여긴 어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정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 혼자 계시는데, 나는 왜 명절 아침에 내 엄마를 혼자 내버려두고 여기서 생전 한번도 보지 못한 분의 차례를 지내고 있어야 하나, 한없이 서러웠다. 딸만 있어서 집안에서만큼은 차별을 모르고 자랐기에 가정에서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일을 왜 꼭 며느리의 손을 빌려서 해야 할까. 다 먹지도 못할 이 많은 음식을 차리는 의미는 뭘까. 결혼 후 명절을 쇠면 쇨수록 의문은 커져만 갔다. 차례를 그만 지내자는 아들들의 만류를 한사코 뿌리치시는 시어머니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지금도 그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지 못한다.

영화 속 봉고 탈출의 주인공인 큰며느리는 당장 돌아오라는 남편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40년 동안 차례 및 제사 준비 노동을 해온 대가로 문중 땅을 판 돈을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고 이혼하겠다고. 그러자 돌아오는 남편의 답. “문중 땅? 당신 유 씨 아니잖아.” 나중에 큰며느리의 제안에 대해 알게 된 둘째 아들은 말한다. “4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며느리라도 성이 다르면 (땅) 못 줘! 가족은 무슨, 남이야 남!” 그러게요. 왜 가족도 아닌 남한테 유 씨 집안 제사와 차례를 40년 동안 맡기셨나요.

여자들이 사라지자 라면을 끓여먹는 남자들. ©(주)백그림
여자들이 사라지자 라면을 끓여먹는 남자들. ©(주)백그림

내게 이번 명절은 여느 명절과 달랐다. 시어머님이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 못하니 며느리들에게 각자의 본가에 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본가로 가도 어차피 5인 이상이 되기에 갈 수 없었지만, 명절 노동 자체가 없어지는 명절이 무엇인지 경험했다.

나는 기름 냄새에 절어서 전을 부치지 않았다. 산더미 같은 음식을 준비하면서 ‘명절이란 무엇인가’ 속으로 하염없이 중얼대지 않았다. ‘명절 같은 거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남편의 불평을 듣지 않아도 됐다. 아기들에게 한복을 입혀서 세배를 하는 동영상을 찍은 뒤 양가에 보냈고 우리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이 영화는 명절 노동을 남녀가 공평하게 나눠서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코로나로 인해 차례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돼 보니, 이 영화의 결말에 완벽히 만족할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해도 명절 노동은 중노동이다. 아예 명절 노동을 안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명절 노동을 공평하게 나눠서 하는 것은 성평등한 명절을 위한 첫단추에 불과하지 마지막 단추가 될 수 없다. 시가의 차례에 며느리를 동원하는 일 자체를 없애야 한다. 설에는 시가에 가고 추석에는 친정에 가든가, 명절에는 아예 각자의 본가에 가서 각자의 조상을 추모해야 한다.

추모의 방식도 바뀌면 좋겠다. 예전에 어디선가 제사의 의미를 배우고 감명 받았다는 한 서양인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면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스파게티 한 그릇을 직접 만들어서 촛불 하나를 켜놓고 ‘이게 나의 제사’라고 했다.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시던 음식만 간소하게 차려서 나눠 먹는 거야말로 진정한 제사 아닐까.   

내 바람이 별나지 않은 꿈이 되는 세상이 되면, ‘큰엄마의 미친 봉고’ 같은 영화야말로 별난 영화로 기억될지 모른다. 옛날엔 글쎄, 차례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집단 가출한 며느리들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대, 속닥속닥, 이렇게.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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