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영재라면?
내 아이가 영재라면?
  • 칼럼니스트 최가을
  • 승인 2021.05.2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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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엄마의 방구석 심야 영화관] 디어 마이 지니어스(2018)

한때 영재였던 대학생 언니와 언니처럼 영재가 되고 싶다는 초등학생 동생. 언니 윤주는 과학 영재였던 화려한 과거를 뒤로 하고 영문학과에 진학해 지금은 졸업을 미루고 있는 영화감독 지망생이다. 동생 윤영은 ‘왠지 높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영재가 되고 싶어하고 학원 가는 걸 좋아하는 여덟 살 어린이다.

과거의 영재 윤주와 현재의 영재 지망생 윤영. ⓒ오엠지프로덕션
과거의 영재 윤주와 현재의 영재 지망생 윤영. ⓒ오엠지프로덕션

두 딸을 성인으로 키워내고 늦둥이 딸 덕분에 다시 학부모가 된 엄마 문선숙 씨. 그는 20여년만에 다시 영재 지망생 딸을 키워내면서 교육열을 불사른다. 막내딸이 2주 동안 읽을 책을 대출한도에 꽉 차게 빌리기 위해서 손수레를 끌고 다니고, 책 만 권 읽기를 목표로 독서 노트를 작성한다.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 백 권도 아니고, 천 권도 아니고 만 권이다. 영화 후반부에는 기록된 책이 7000번을 넘어간다.) 각종 학원에 데려다주고, 학교와 학원 시험에 철저히 대비한다.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청소 후 깨끗해진 집을 볼 때와 윤영이 공부를 흡족하게 시키고 하루를 마감할 때. 윤영이 공부가 잘 된 날은 잠도 잘 온다고.

늦둥이 막내딸을 두고 교육열을 불사르는 엄마 문선숙 씨. ⓒ오엠지프로덕션
늦둥이 막내딸을 두고 교육열을 불사르는 엄마 문선숙 씨. ⓒ오엠지프로덕션

과학 영재로 선발되어 미국 나사 견학까지 갔던 윤주는 엄마의 교육 방식에 반기를 든다.

윤주: 내가 그거 해봤잖아. 별 소용 없어. 애들은 놀아야 돼.

엄마: 애가 해야 할 일에 책임을 지고,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야지.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멍하니 있으란 말이야?

언니와 엄마의 양육 방식이 대격돌하지만, 당연하게도 승자는 엄마다. 언니가 자기 인생의 과업인 취직 준비를 포기하고 동생 육아를 도맡지 않는 이상, 엄마가 주양육자니까. 엄마가 무거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만큼, 발언권도 엄마에게 있다.

온갖 상장을 휩쓸고 영재 교육을 받으며 자란 언니 윤주. ⓒ오엠지프로덕션
온갖 상장을 휩쓸고 영재 교육을 받으며 자란 언니 윤주. ⓒ오엠지프로덕션

아직 쌍둥이들이 두 돌밖에 안 돼서 나에게 아직 교육은 먼 얘기, 육아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만 엄마로서 영화를 보니 윤영의 엄마 문선숙 씨를 보는 마음이 크로와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여러 겹으로 부풀어올랐다.

첫번째 감정은 ‘우와 정말 열정적이다’라는 것이었다. 내 책 빌리러 가도 무거워서 열 권 이상은 못 빌리는데 한 달에 두 번씩 스무 권도 넘는 아이 책을 빌린다고? 그것도 한 권 한 권 직접 골라서? 두 돌 아이 밥 먹이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건 “얘도 인간이라서 억지로 뭔가를 시키는 것만큼 속 터지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활동인 식사마저도 억지로 시키면 몸에 사리가 나올 것 같은데, 안 한다고 굶어죽지는 않는 각종 시험 준비는 어떻게 시킬까.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너무 강력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이랑 실랑이하는 게 귀찮아서 먹기 싫으면 먹지 말고 다음 끼니라도 많이 먹으라고, 아이에게 지고 마는 나같은 엄마는 저렇게 못할 것 같았다.

싫다는 애 붙잡고 밥 먹이기도 고역인데 우는 애 붙잡고 공부라니.. ⓒ오엠지프로덕션
싫다는 애 붙잡고 밥 먹이기도 고역인데 우는 애 붙잡고 공부라니.. ⓒ오엠지프로덕션

그러면서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열정이 부족해서, 혹시 내 아이들이 공부에 소질이 있는데 내가 그 소질을 충분히 키워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현실은 음, 쌍둥이들은 영재는커녕 “평균을 겨우 따라가는 발달 정도네요.”라는 소아과 의사의 판정을 받았다. (딱 평균이라니 ‘중도의 미’를 아는 아기들이로다.)

두번째로 든 감정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였다. 영화 초반부에 여덟 살이었던 윤영은 학원 가는 걸 좋아하는 아이지만 촬영 기간이 3년이 되면서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밥 먹는 데 두 시간씩 걸리기도 하고, 놀 때는 멀쩡하다가 공부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고, 오랜만에 집에 온 언니와 놀 생각에 들떠있다가 숙제부터 하라는 엄마의 말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몸과 마음에 저렇게까지 스트레스를 주면서, 영재 교육이라는 걸 해야만 하나.

그놈의 영재가 뭐라고! ⓒ오엠지프로덕션
그놈의 영재가 뭐라고! ⓒ오엠지프로덕션

다행히도(?) 엄마 문선숙 씨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윤영이 스트레스를 받자 학원 갯수를 줄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영재 시험은 안 보기로 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독서 올림피아드 고사장에 데리고 가는 등 문선숙 씨 교육열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내 눈에는 그 정도도 꽤 많이 시키는 정도로 보였는데, 초등학교 교사인 둘째딸 윤희가 잘라 말한다. “언니, 요즘 애들에 비하면 윤영이는 자유롭고 해피한 편이야.”

웃으면 이렇게 '해피'해보이는 것을. ⓒ오엠지프로덕션
웃으면 이렇게 '해피'해보이는 것을. ⓒ오엠지프로덕션

독서를 즐기는 게 아니라 독서가 ‘올림피아드’라는 평가의 도구가 되고, 영재 시험을 포기하고 “근데 영재 시험 본 애들만 엘리트가 되는 거잖아. 걔네가 너무 거슬려.”라는 말이 열 살짜리 아이 입에서 나오는데, 이 정도가 ‘해피’하다고?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이 정신이 얼얼해졌다. 현실이 이렇게까지 혹독하다니.

나는 아이들이 무작정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교육의 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놀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한 만큼 공부하는 습관을 키우는 것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학원 네 개를 다니는 아이가 “나 정도면 친구들 중에서도 학원 안 다니는 편이야.”라고 말하는 현실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 마디로 나는 영화 속 엄마 문선숙 씨와 딸 윤주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한 마디로, 소신이 강력한 것도 아니고 교육열이 뜨거운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엄마다.

이도저도 아닌 엄마의 갈 길은 어디란 말입니까. ⓒ오엠지프로덕션
이도저도 아닌 엄마의 갈 길은 어디란 말입니까. ⓒ오엠지프로덕션

아이는 엄마 혼자 키우는 게 아니라 가정에서의 양육자, 기관의 교사, 그리고 온 사회가 함께 키우는 것이니 아이들 교육이 전적으로 엄마 몫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양육자로서 내 여정이 술 취한 사람마냥 이리저리 갈지자를 그릴 것이 분명하다. 윤주 쪽이든, 윤주 엄마 쪽이든, 그 중간이든 조만간 노선을 분명히 정해야 할 텐데, 사교육 열병을 앓는 사회에 용감하게 아이를 둘씩이나 내놓은 자의 책임이 무겁다.

쿨쿨 자고 있는 쌍둥이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엄마, 그러지 마시고 우리 배변훈련 언제 시작할지나 결정하세요.”라고 할 것 같지만. 그래, 똥오줌을 변기에 눌 줄 아는 능력도 탑재 안 된 너희들을 두고 공부가 웬 말이냐.

*칼럼니스트 최가을은 구 난임인, 현 남매 쌍둥이를 둔 워킹맘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휴대전화로 영화를 본다. 난임 고군분투기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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