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아내 지키는 마흔아홉 아빠 ”이번에도 꼭 살릴 거다. 걱정말라“
암 투병 아내 지키는 마흔아홉 아빠 ”이번에도 꼭 살릴 거다. 걱정말라“
  • 최대성 기자
  • 승인 2021.06.17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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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아빠살이] 암 투병 아내를 지키는 아빠 한진환 씨 이야기

【베이비뉴스 최대성 기자】

아픈 아내를 위해 생전 처음 요식업에 뛰어든 아빠 한진환 씨가 본인의 가게 '해적돼지' 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아픈 아내를 위해 생전 처음 요식업에 뛰어든 아빠 한진환 씨가 본인의 가게 '해적돼지' 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악플이요? 상관없습니다.”

모진 댓글에 스러진 이가 어디 한둘일까? 사진에 노출된 가게 이름에 ’대놓고 광고하냐’는 악플이 쏟아질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고 했다. 그에게 이 가게는 마지막 지푸라기라서 어떻게든 성공해야 아내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악플 따위 상관없다는 그의 말에 주저 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사연 많은 얼굴이 사진에 담겼다. ‘40대 아빠살이’ 6번째 주인공은 아픈 아내를 위해 고깃집 ‘해적돼지’를 차린 중고차 딜러 한진환 씨 이야기다.

◇ “대장암 수술 후 7년... 그리고 재발”

아내가 대장암 수술한 지 7년이 지났다. 보통 5년이 지나면 의학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중증 환자 그룹에서도 빠졌다. 다시 찾아온 보통의 일상에 부부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불현듯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완치 판정을 받고 나서는 정기검사를 1년마다 하고 있었어요. 2019년 12월에도 검진을 했었는데 피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페시티(PET CT) 검사를 했습니다.”

이듬해 1월 2일. 부부는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마주한 의사는 암이 재발했다고 말했다. 같은 곳에 다시 생겨난 게 아니라 림프절로 전이가 됐다고 했다. 2013년에 첫 수술을 했으니 7년 만이다. 

“재발했다는 소리를 듣고 저와 아내 모두 놀랬어요. 암이 재발했다는 건 사망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니까요. 첫 발병 때도 그랬지만 아내는 이번에도 아이들 걱정을 가장 먼저 했어요. 자기가 지금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는 7년 전과는 다르게 겁이 났다고 말했다. 이제는 재발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 마음을 추슬렀다.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아내에게 한 번 더 약속을 했다. 

“네가 왜 죽냐. 내가 너 처음에 한 번 살렸는데, 이번에도 꼭 살릴 거다. 걱정하지 마라.”

그는 애써 큰소리를 쳤지만, 첫 발병 때만큼 자신 있게 말하진 못했다. 며칠 후 암이 전이된 림프절을 걷어내는 수술을 했다. 그리고 이어진 항암치료는 또다시 아내의 몸을 상하게 했다. 그래도 아내는 가족을 위해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치료 과정에서 암 지표 지수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그래서 또 페시티를 찍었다. 예정된 12번의 항암 치료 중 10번이 지났을 때 담당의가 갑자기 불렀다. 불길했다.

“뼈로 전이가 됐다고 말했어요. 담당의가 외과에서 자신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종양내과로 옮기라고 하더라고요. 충격이었어요. 일단 아내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안 나가려고 하는 걸 억지로 내보냈죠. 그리고 의사에게 나는 보호자니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고 했어요. 의사는 ‘뼈로 전이가 되면 힘들어진다. 지금 위험한 상태다’라고 말했어요.” 

그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속으로 삭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아내 앞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데리고 종양내과로 갔다. 이번에는 아내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교수와 단독으로 면담을 했다. 의사는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다만, 아내와 같은 환자 중에 9% 정도는 완치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 9%에 들도록 노력해보자고 했다. 약도 치료 방법도 다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는 희망을 말하는 의사를 붙잡고 아내를 살려달라 애원했다.

“아내를 병실에 올려보내고 일 때문에 천안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그때 비가 정말 많이 내렸는데 비 때문이 아니라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서 운전을 못 하겠더라고요.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때,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 “동갑내기 친구에서 부부가 되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그는 지금의 아내를 인터넷 친목 동호회에서 만났다. 같은 취미를 가진 동갑내기 사람들의 모임이다. 친목회인 만큼 남과 여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자주 흘렀지만, 그 당시 그는 여성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꿈과 야망을 펼치고 싶은 서른여섯 청년이었다.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연애에 마음을 쏟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무쇠 같은 그의 마음을 녹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아내다. 

”동호회 활동을 하다 보니까 눈에 자꾸 들어왔어요. 저 사람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영화 한 편 보자고 먼저 연락했죠.“

사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영화관이 아닌 찻집으로 향했다. 첫 만남에 둘이 영화를 보는 건 아무래도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차 한잔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가 잘 통했다. 저녁까지 먹고 집에 데려다준 후 애프터까지 승낙 받았다. 나름 성공적인 첫 데이트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날 그녀의 또 다른 모습에 한 번 더 반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저희 집안은 매우 보수적이에요. 남녀가 겸상을 하지 않을 정도였죠. 그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도 현모양처 같은 여성이 이상형이었어요. 동호회에서 만난 지금 제 아내는 사실 완전히 반대 성향이었거든요. 참 이상한 일이었죠. 그런데 첫 만남에서 보니 제가 좋아하는 모습도 있더라고요. 상대방을 배려해 줬어요. 예를 들어, 식당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거나 하는 소소한 배려가 참 좋았어요. 그리고 똑똑한 줄만 알았는데 가끔 허당 같은 모습도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니 옆에서 챙겨주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그들은 모든 난관을 뚫고 2010년 1월 3일 결혼에 골인했다. ⓒ한진환
그들은 모든 난관을 뚫고 2010년 1월 3일 결혼에 골인했다. ⓒ한진환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들은 손끝이 간지러울 만큼 애틋했다. 그렇게 둘은 알콩달콩 1년간 만남을 이어갔다. 그는 원래 비혼주의자였지만 어느 순간 이 사람과 결혼하면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꼭 붙어 있다 보니 봄비처럼 서로에게 스며든 것이다.

”적어도 불행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만난 지 1년이 넘었을 때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 초대 가수로 온 유리상자에게 노래를 신청하면서 ‘선미야 나랑 결혼해줘 사랑한다’라고 쓴 메시지를 줬어요. 그런데 유리상자가 그 사연을 직접 읽어주면서 프러포즈를 하게 된 거죠.“ 

당시 아내는 ‘이런 고백을 왜 사람들 많은 데서 하냐‘며 부끄러워했지만,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을 수줍게 받아줬다. 

프러포즈는 했지만, 결혼까지는 첩첩산중이었다. 운영 중인 자동차 튜닝샵이 망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거래처에 대금 지급을 못해 5000만 원이 넘는 빚까지 졌다. 결국, 상견례를 앞두고 무직에 빚쟁이가 됐다. 

”가게를 정리하고 빚만 남은 날,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자취하는 아내 집에 갔어요. 아내가 보는 앞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어요. 아내에게 ’솔직히 망했다. 나는 이제 바닥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너를 건사할 능력이 안 되니 우리 그만 헤어지자‘라고 말한 후 픽 쓰러졌어요. 그때 저는 소주 2잔이 치사량이었거든요.“ 

다음날. 절망에 빠진 그를 보고 아내가 한마디 했다. 

”내가 먹여 살릴 게. 나 월급 많이 받아.“

◇ ’불현듯 찾아온 대장암‘

자동차 튜닝샵이 망한 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고객 중 한 분이 중고차 딜러였는데 추천을 받아 딜러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악착같이 일했다. 결혼을 했고 신혼이었지만, 새로운 일이었고 빚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가부장적인 사람이었지만, 바쁜 일 탓에 가사를 도와주진 못했다. 집안일은 온전히 아내의 몫이었다. 허니문 베이비로 첫째가 태어나서 신혼 기간도 짧았다. 아내는 임신 7개월까지 직장을 다니다가 퇴사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그는 가사와 육아를 멀리했다.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은 남자가, 여자는 살림을 하고 남편을 내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그 당시 저는 퇴근 후 소파에서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뉴스만 볼 정도로 가사나 육아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것 때문에 이혼할 뻔도 했죠. 돌이켜 보면 정말 나쁜 남편, 나쁜 아빠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 내내 나쁜 남편은 아니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아와 가사는 남녀가 분담해야 한다는 뉴스 기사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그도 서서히 변해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바뀐 건 그의 아내가 아프고 나서였다. 

”2013년이었어요. 아내가 고향 동창 덕분에 전신 건강검진을 받았어요. 평생 처음 받은 건강검진이었는데 그때 대장암 진단을 받은 거죠.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주말을 보내고 맞은 월요일에 건강검진센터에서 전화가 왔어요. 대장내시경 과정 중에 이상한 부분이 보여서 조직검사를 보냈더니 악성 종양으로 결과가 나왔다며 빨리 와서 확인해달라고 했어요.“

상황이 급박하면 되레 침착해지는 게 그가 가진 장점이다. 그는 검진센터로 가는 동안 의료직에 종사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조직검사 샘플이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그만큼 믿고 싶지 않았다. 울고 있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도착했다. 센터 선생님은 악성 종양이라고 말했다. 당시 암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었던 그는 악성 종양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지인을 통해 수원의 한 병원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대장암 전문의에게 센터에서 받은 내시경 사진을 보여줬다. 의사는 사진상으로는 1기 정도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정확한 검사를 위해 다시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듣게 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3.5기라고 했어요. 암이 온순한 편인 것 같지만 지금 수술하면 확 퍼지니 일단 방사선 수술을 하자고 하셨어요. 그때는 3.5기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기도 했고, 의료계에 종사하는 지인이 대장암은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서 아내가 잘못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잘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죠.“ 

중고차 딜러 일이 정말 잘 돼서 빚도 갚고 집도 넓혔던 시점이었다. 아이도 잘 자라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구나 싶었을 때 벌어진 불행이었다. 

”아내는 계속 울었어요. 그래서 너 당장 죽는 거 아니다. 예후가 좋다는 말 들었잖느냐. 치료 잘 받고 수술 잘 받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냐고 말했죠. 오히려 담담한 척했어요. 특히, 막 돌이 지난 둘째를 걱정하며 죽기 싫다고 말할 때마다 되레 화를 냈어요. 내가 있는데 누가 죽냐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는 스스로를 나쁜 아빠, 나쁜 남편이었다고 말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그는 스스로를 나쁜 아빠, 나쁜 남편이었다고 말했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얘네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큰일을 당하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사람이지만, 암이 재발하자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특히 뼈로 전이됐다는 소식은 그를 더 당황케 했다. 하지만 자식과 아내 앞에서는 언제나처럼 단단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특히, 아내가 심리적으로 힘들어할 때마다 일부러 더 그랬다. 

“예전에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그분이 아내에게 골골 90세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아내가 마음이 아플 때마다 ’너 골골 90세잖아. 걱정하지 마. 딱 우리 애들 시집 장가갈 때까지만, 조금 더 가면 아기 낳을 때까지만 살다가 한날한시에 같이 가자고 농담처럼 말해줬어요.”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몸과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울음을 참으며 털어놓은 그의 이야기에 남편이자 아빠로서 짊어진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요즘은 아내가 격주로 입원을 해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어요. 이제 1년 반 정도 지났네요. 솔직히 요즘 많이 힘들어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이렇게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은 처음이거든요. 처음 발병했을 때는 여러분들이 도와주셨지만, 지금은 혼자서 사업과 가사도 하고 아내 병간호도 하고 있어요. 특히, 뼈 전이 소식을 듣고 나서는 혼자 많이 울기도 해요. 물론 앞에서 티 내지는 않지만요. 언젠가 일 때문에 새벽에 집에 들어온 적이 있는데, 아내가 거실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자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얘네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어떻게든 책임져야겠다. 내가 죽을힘으로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겠다‘고 혼자 다짐을 했어요.”

◇ “엄마 뱃속에 벌레가 있어서 수술한 거야”

첫 번째 발병했을 무렵 둘째 아이는 돌이 막 지났었다. 그리고 암이 재발한 작년에는 9살이 됐다. 부부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엄마가 아픈 사실을 미리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길 바랐다. 그래서 평상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대장암’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 치료나 수술을 위해 장기간 병원을 가야 할 경우 아이들에게는 ‘엄마 뱃속에 벌레가 있어서 없애러 가는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탄로 날 거짓말이었다. 

“작년에 수술 후 엄마가 퇴원하기 전에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갔어요. 엄마 뱃속에 벌레가 있어서 벌레 잡느라고 수술했다고 말해줬죠. 아픈 엄마 모습에 아이들이 울었지만 그냥 그걸로 끝났어요. 아직 어리니까... 둘째는 지금도 그런 줄 알아요. 그런데 12살 첫째가 학교에서 암에 대한 영상을 봤는지 자꾸 엄마한테 꼬치꼬치 물어본 거예요. 아무래도 학교에서 본 거랑 엄마 모습이 비슷하니까... 아내가 아이에게 이야기해 줄지를 물어보길래 말하라고 했어요.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으니까요. 엄마가 암에 걸렸지만 안 죽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해줬고,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일을 직접 이야기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변화는 오히려 그에게 생겼다. 아내의 암이 재발한 지금은 그냥 살아만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모든 취미활동을 완전히 끊었다. 그것보다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에 행복을 느끼는 그였지만, 별로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다. 아픈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 커피 한 잔도 사치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도 여력이 없다. 중고차 딜러를 시작으로 벌여놓은 사업도 코로나 때문에 이젠 여의치 않았다. 병원비도 더 이상 보험처리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진환 씨 제공
그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진환 씨 제공

◇ “아내를 위해 요식업에 뛰어들었어요”

그는 식당에 ’ㅅ‘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터라 어릴 때부터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팔자에도 없던 돼지고기 식당을 차렸다. 오로지 아픈 아내를 위해서다.

“작년에 아내가 수술한 후 약간 우울증 증세를 보였어요. 좋은 공기도 마시고 기분전환도 할 겸 그럴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어요. 여행을 갔으면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 하는데, 아내는 돼지고기를 못 먹었어요. 먹으면 밤새 설사했거든요. 돼지고기는 대장암 환자가 가능하면 피해야 할 음식 중에 하나죠. 날것도 먹으면 안돼요. 그러다 보니 제주도까지 갔는데 먹을 게 없는 거죠. 저는 제주도 흑돼지는 다르니까 조금만 먹어보자 했어요. 그런데 괜찮은 거예요. 다음날 또 먹었죠. 아내가 너무 잘 먹었어요. 밤에 탈도 안 났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었죠. 그 부위가 흑돼지 접착뼈였는데 특수한 부위라 육지에서는 구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매번 제주도로 데려갈 순 없잖아요. 그래서 아내가 좋아질 때까지만 제주도에 살아보려고 집을 알아본 적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아내가 반대를 해서 그러지 못했어요.”

그는 아내가 좋은 공기 속에서 숨 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제주도로 이사 가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럴 수 없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사업도 잘 안됐던 상황. 그래서 고민 끝에 결단했다.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제주도 돼지고기 전문점을 열면 병원비도 벌면서 아내가 제주 돼지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단 한 번도 요식업을 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아내를 위해서 용기를 냈다. 밑천은 18년간의 자취 생활과 고등학교 때 했던 알아이(접시딱기) 알바, 30대 초반에 경험했던 1년간의 정육점 알바가 전부였다.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가게 오픈을 위해 4~5개월 동안 밤잠을 설치며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달고 정도만 알았어요. 눈만 뜨면 맛집을 돌아다니고 유튜브, 네이버에 나온 정보를 정말 많이 찾아봤습니다. 거기에 된장찌개 맛나게 끓이는 방법, 파채 소스, 계란찜 만드는 법도 다 나와 있더라고요. 매일 연습하면서 나한테 맞는 것과 해보니 맛있는 것을 찾았어요. 특히,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많이 봤는데 백종원 씨가 툭툭 던지는 팁을 메모했다가 실제로 적용하면서 준비했어요. 그때도 그랬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만 되는 게 요식업인 것 같아요. 제가 해본 사업 중에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실 아내는 그가 고깃집을 시작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가게 인테리어를 할 때만 해도 아내에게 “나 고기 좋아하잖아. 실컷 먹으려고.”라고 말했다. 오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내가 “왜 제주도 돼지고기만 팔아? 국내도 팔고 다른 고기도 팔아봐”라고 말하길래 그는 그제야 털어놨다.     

“아니야 제주도만 할래, 당신은 제주도 돼지고기 먹으면 탈이 안 나잖아.”

그에게 이 가게는 마지막 지푸라기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그에게 이 가게는 마지막 지푸라기다. 최대성 기자 ⓒ베이비뉴스

◇ “이게 잘 돼야 아내를 살린다”

그는 고깃집에 모든 걸 걸었다. 가게가 잘 돼야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고, 그래야 아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도전했던 어떤 사업보다 의미와 이유가 크다.

“이 가게를 개업할 때 여기에 한번 다 걸어보자 나의 운과 열정을 다 걸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경제적인 여력이 없기 때문에 망하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열심히 장을 봐서 출근하고 있어요. 항상 오늘은 몇 분의 손님이 오실까 어떤 서비스를 드릴까 생각하죠. 무엇보다 ’이게 잘돼야 아내를 살린다’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에게 이곳은 최후의 지푸라기입니다.” 

현재 그는 오전에는 중고자 딜러 일을 하고 오후부터는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식당을 운영하면서부터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당장 아이들은 예전보다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에게 서운한 마음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악착같이 일을 하고 있다. 오로지 아이들과 아내를 지켜주기 위해서다. 

”아이들에게 저는 슈퍼맨 아빠예요. 장난감도 뚝딱 고쳐주고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다 사주는 편이거든요. 아내에게도 슈퍼맨이 되고 싶은 게 제 심정이에요. 왜냐하면 아내는 제게 엄마 같은 사람이거든요. 나한테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 ‘만약’

‘만약’이란 단어에는 희망과 후회가 뒤섞여 있다. 남편이자 아빠로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만약을 물었다. 

”만약에 다음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저는 이 사람과 또 결혼할 거예요. 그 대신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잘해줄 것 같아요. 아프지 않게. 사실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 제가 육아와 가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부터 잘해주고 싶어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잘해준 것보다 못해줬던 게 더 생각이 나네요.“
 
*기획 연재 [40대 아빠살이]는 인생의 하프타임에서 '결단'을 내린 이 시대 40대 아빠들의 삶을 담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거나 주변에 그런 결단을 내린 사람을 추천해주고 싶으시다면 이메일(ds.choi@ibabynews.com)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직접 만나서 듣고 찍고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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