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전아름 기자】
밤 10시. 드디어 육퇴다. 엄마도 함께 자야 할 시간이지만, 혹은 아이가 있을 때 미처 다 하지 못한 집안일이 산더미지만 엄마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시간이다. 오늘은 뭘 볼까.
결혼한 여성들의 삶을 탐구하는 모임 '부너미'가 '혼자 같이 보는 영화'로 말을 걸고 그 기록을 신간 「우리 같이 볼래요?」로 펴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엄마다. 아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웠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추천하는 영화는 '전 세계를 휩쓴 최신 흥행작'도 아니고 '어려운 영화'도 아닌, 가정에 고립된 엄마들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볼 수 있는 작품 26편이다.
이들이 골라준 영화는 결혼 제도나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에 관한 상상, 동등한 가사 분담, 이혼 부부의 건강한 관계 맺기, 성평등 육아, 고부 연대, 출산 뒤 몸에서 일어난 변화와 자기 긍정, 부모 돌봄, 일과 삶의 균형 등 다양한 주제를 담았다. 흥미로운 영화 이야기에 더해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기혼 여성들이 맞닥트린 현실 속 고민, 좌절, 혼란, 실천도 만날 수 있다
부너미가 쓴 엄마들의 영화 이야기는 세 가지 해시태그로 갈무리된다. 1장 ‘조조할인’에서 엄마들은 ▲우리집 ▲기생충 ▲자일리 ▲보이후드 ▲우리의 20세기 ▲결혼이야기 ▲톰보이 ▲B급며느리를 본다. 2장 '심야 영화'에서 만나는 엄마들의 영화는 ▲툴리 ▲펭귄 블룸 ▲박강아름, 결혼하다 ▲남매의 여름밤 ▲레볼루셔너리 로드 ▲벌새 ▲소공녀 ▲욕창 ▲케빈에 대하여다. 3장 '주말의 명화'에 담긴 목록은 ▲82년생 김지영 ▲찬실이는 복도 많지 ▲디 아워스 ▲마나나의 가출 ▲안토니아스 라인 ▲비포 미드나잇 ▲블랙 위도우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크루엘라다.
앞서 부너미는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와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등 강하고 도발적인 주제의 책 두 권을 펴낸 바 있다. 그러나 「우리 같이 볼래요」는 위의 두 책 처럼 '매운 맛'은 아니다. 많은 엄마들이 모여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일상에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누구나 고개 끄덕일 만한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부너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는 공감을 끌어내는 힘을 지닌 예술이고, 공감에 바탕한 이야기들은 좀더 쉽게 전달되리라 믿는다고. 단, 이 짧은 글들이 가부장제에 제기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우리 같이 볼래요」는 기혼 여성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려 노력한 결실이다.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아내, 엄마, 딸, 며느리 같은 ‘정상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기혼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다양한 영화를 매개로 느낀 감동과 기쁨, 혼란과 좌절, 희망과 실천적 노력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부너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엄마의 모습은 여전히 단편적이고, 영화 평론가나 학자가 엄마의 삶을 분석한 글은 뭔가 불편한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 같이 볼래요」를 함께 쓴 우리의 목표는 결혼 제도 바깥에 서 있는 여성들까지 포함해 영화 이야기를 우리들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가는 일이라고 말이다.
자녀들에게 매달릴 시간이 없다. 내게 주어진 인생 2막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B급 며느리’ 진영처럼 ‘B급 시어머니’로 살려 한다. ‘따뜻한 무관심’과 ‘연대하지 않는 연대’를 통해 평상시에는 무심하게 지내려 한다. 도움을 청할 때 도울 수 있는 여건이면 돕고, 상황이 안 되면 ‘노’라고 대답하면 된다. 비급 며느리만 있는가? 비급 시어머니도 있다. - 77쪽
남편은 회사 생활을 우선하다가 퇴근 뒤 한두 시간 또는 주말에 아이들하고 신나게 놀아주면 ‘아빠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꾸준히 경력을 쌓았고, 연봉도 올랐다. 경제력과 돌봄력을 다 갖춘 매력적인 삶이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주 양육자 구실을 하면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밤낮없이 일해도 수입은 불안정했고, 집에서 일하다 보니 아이들하고 갈등이 자주 생겼다. 체력과 인내심은 바닥났다. 간식 달라는 말에도, 색종이 잘라 달라는 말에도 짜증이 났다. -158쪽
영화관하고 멀어진 이유는 아이 탓도 아니고 남편 탓도 아니었다. 티켓 가격을 보면서 생활비가 먼저 떠올랐고, 후줄근한 나를 단장하고 동네를 벗어나 시내 영화관으로 가기도 귀찮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하는 일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한 과정도 모두 번거로웠다. 아이 데리고 시가에 가면서 간만에 혼자 영화도 보고 쉬고 오라며 남편이 권해도 집에서 냉장고 정리를 한 사람은 나였다. 나만을 위한 작은 지출도 사치라며 내 욕구나 취향을 가볍게 밀어낸 사람도 나였다. 문득 영화 보러 영화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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